모든 빛을 흡수하는 색, 검은색이다.

 

눈 앞에 여러 가지의 색이 있다. 그 중 하나의 색을 골라야 할 때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선택은 ‘검정’이다. 튀지는 않지만 본연의 매력을 그대로 뽐낼 수 있는 검정은 패션계에서는 물론 전자기기, 자동차 업계 등에서도 환영 받는 색이다.

 

혼자만의 매력은 물론이요, 어떤 색과도 잘 어우러지는 ‘검정’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문화 속 Blackholic

문화 속에 녹아 있는 검은색의 이미지는 본연의 색처럼 어둡기만 하다. 주로 ‘악’을 상징하며 하얀색과 비교되며 죽음에도 깊은 연관을 둬 애도를 뜻하는 색이 됐다. 장례식장을 찾을 때는 검은 옷을 입는 것이 예의다. 상복으로 검은 옷을 입는 것은 1861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의 죽음 이후 계속 검은 옷을 입었던 것이 시초가 됐다.

빅토리아 여왕의 상복(왼쪽), 영화 <회복> 속의 유대인 랍비(오른쪽)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비탄하는 의미에서 지금까지도 매일 검은 옷과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그 안에는 신을 존경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죽음’이나 ‘멸망’을 의미하는 검정에도 ‘영원’과 ‘고귀’와 같은 긍정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

 

설날 이맘때쯤이면 비싼 흰 고무신은 신지 못하고 새 검정고무신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창고에나 들어가 있을 법한 검정고무신. 부모님 세대의 옛추억을 자극하는 검정고무신은 만화로 등장해 우리 세대에게도 인기가 좋았다. 만화주제가처럼 정말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웃지 못할 이야기, 정다운 얘기’다.

 

우리나라야 대부분 흑발이다 보니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지만 서양인들은 흑발과 검은 눈동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헐리우드의 여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흑발과 검은 눈동자가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음식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던 검은색이 2007년 돌연 ‘블랙푸드’란 이름을 달고 급부상했다. 검은색을 띤 식품들이 노화를 억제하고 암을 예방하는 등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 그 이유였다. 기존의 검은색이었던 검은콩, 검은깨, 흑미, 김 등의 인기가 오르고 흑마늘은 독특한 생김새에 다양한 효능으로 비싼 가격에도 없어 못 파는 식품이 됐다.

 

무술에서는 항상 검은띠가 최고 수준을 뜻한다. 여기서 검은색은 ‘겸허’와 ‘완성’을 뜻해 검은띠는 태권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무술의 완성을 보여주는 증표다. 우리나라는 태권도장 곳곳마다 꼬마 무술종결자가 넘쳐나지만.

 

브랜드 속 Blackholic

 

올블랙만큼 시크한 것은 없다. 가볍지 않은 느낌으로 도도하면서 섹시하기까지 한 이 색은 특히 패션계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컬러다. 각종 론칭 행사나 파티장을 찾아보면 80% 이상은 블랙의 의상을 입고 있으니 말 다 했다.

 

특히, 이런 자리에서 리틀블랙드레스(일명 LBD)는 영원한 스테디 셀러다. 첫 등장은 샤넬이다. 당시 서양에서 검은색은 장례식에서나 허용되던 색이었지만 샤넬은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다. 현대에 이르러서 LBD는 여성들의 옷장에 단단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칼 라커펠트로 세대 교체된 샤넬은 아직도 블랙에 빠져있다.

샤넬 2010 레디투웨어 컬렉션

 

신부가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을 때 신랑은 검정의 단정한 턱시도를 입는다. 하얀 웨딩드레스의 신부를 돋보이게 하기도 하지만 검정 수트는 보우 타이, 코사지와 함께 하면 근사한 신랑으로 만들어 준다.

 

 

이른바 올흰 컨버스는 가고 올블랙 컨버스가 뜨고 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컨버스 하이는 올블랙으로 워커의 느낌까지 더한다. 밑창과 앞코, 운동화끈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 ‘시크’한 올블랙의 진수를 보여준다. 컨버스 외에도 반스 어센틱, 뉴발란스, 나이키 등 올블랙이 대세다.

 

뿔테 안경은 때로는 분위기 있게, 때로는 귀엽게 연출해주는 아이템이다. 뿔테는 단연 검은 뿔테여야 한다. 남자들에게는 지성미를 여자들에게는 발랄함을 더해주는 검은 뿔테는 안경도 패션이 되게 해준다.  

 

 

블랙푸드에는 끼지 못해도 검은색으로 세계인의 기호식품이 되는 것이 바로 커피다. 크림을 넣지않은 블랙커피 한 잔은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고. 또 하나의 검은 마실 거리로 ‘흑맥주’가 있다. 맥아를 까맣게 태워 만든 흑맥주는 아일랜드의 스타우트가 특히 유명하다. 하이트의 이름만 스타우트는 패키지가 그럴 듯 하다.  

전자기기는 원래 질리지 않는 블랙이 대세다. 그 중 오바마의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블랙베리’는 특별히 검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기존 휴대폰과 생김새부터가 달랐던 블랙베리는 다가가기가 조금 어려운 휴대폰이었다. 하지만 그런 독특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 둘 유저가 늘어났다. 비즈니스용으로는 아직도 위상을 드러내는 휴대폰이다.

 

‘블랙라벨’이라는 단어는 소재를 고급화하고 가격을 한 단계 높은 고급 제품을 지칭한다. ‘에디션’과 비슷한 개념으로 주로 소량 생산해 희소성을 둔다. 애초 의류에 주로 붙었던 블랙라벨이 요즘엔 어디에다 이용되고 있다. 블랙의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여행 속 Blackholic

 

제주도 옆 우도에는 검멀레 해수욕장이 있다. 마치 외국어 같은 제주의 사투리는 검은 모래를 검멀레라고 부르고 있다. 검멀레 해수욕장엔 검은 모래가 가득하다. 이색적인 이 풍경은 아름답기로 손꼽힌 ‘우도 8경’ 중 하나의 절경이다. 제주에 가면 꼭 먹어야 하는 먹거리 ‘흑돼지’도 검다. 껍데기의 검은 살결과 짜리몽땅한 검은 털들이 입맛을 돋우지는 못하지만 맛은 기가 막히다.

 

검은 모래는 일본의 큐슈의 것도 유명하다. 이 곳의 모래로는 꼭 찜질을 해봐야 한다. 온천욕을 모래로 즐기는 셈이다. 화산석이 잘게 부서져 이루어진 이부스키의 검은 모래 해변은 그 색이 검은 만큼 모래가 아주 뜨겁다. 햇빛을 잘 흡수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화산재를 내뿜는 화산들의 온천수가 지하수맥을 따라 모래를 데우는 것. 이 모래로 찜질을 하면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관절염에도 좋다고 한다.

흑해의 위성사진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작은 바다 ‘흑해’의 물은 정말 검다. 육지로 막혀 있는 흑해는 수면층 외에는 전반적으로 산소가 부족하고 유화수소가 고도로 농축돼 있어 물 색이 검다. 산소가 부족해 물고기는 많이 살지 않지만 흑해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러시아의 왕자 우루소프가 결혼식 후 여객선으로 흑해를 건너다 신부의 반지를 흑해에 빠뜨리고 말았다. 러시아에서는 결혼반지를 잃어버리면 신부를 잃게 된다는 전설이 있어 이 왕자는 흑해의 일부를 통째로 사들인다. 그래서인지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MBC 다큐멘터리 '아프리카의 눈물'의 한 장면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진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적소다. 약간의 위험과 정보의 부족 때문에 아직 아프리카를 찾는 사람은 적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아프리카의 여행을 꿈꾼다. 그 곳에는 이유 없는 눈물을 부르는 자연이 있고 검은 진주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영화 <블랙>에서의 ‘블랙’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던 암흑의 상태인 주인공의 세상을 칭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블랙’의 세상 속에서 기적적인 희망을 보여줬다.

 

검정은 이따금 보지 못하는 것을 더 눈에 띄게 해준다. 어둡고 무거워 보이는 검은색은 어쩌면 어떤 색보다도 따뜻하고 친절한 색일지도.

 

IT조선 염아영 기자 yeomah@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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