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지주회사와 관련된 각종 사고가 빈발하면서 금융기관의 지배구조 문제와 이 같은 허점을 악용해온 관치금융 폐해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현재 금융권 CEO의 운명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형국이다. 사실상 칼자루를 쥔 금융당국의 결정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벼랑 끝에 선 금융기관 CEO의 현 모습과 과거 각종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을 했던 역대 CEO들의 행보를 되짚어 봄으로써, 다람쥐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관치금융 잔혹사'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IT조선 김남규 기자] 최근 국내 금융권은 흡사 태풍의 눈을 연상케 할 만큼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대규모 제재를 앞둔 상황에서 하나같이 바짝 몸을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KB금융은 회장과 은행장의 힘겨루기 사태부터 각종 비리사건으로 감독당국의 제재를 앞두고 있으며, 하나지주는 외환은행 주식 취득 문제 등이 위법성 시비에 휘말려 CEO의 사법처리 가능성까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또한 우리금융은 CJ비자금 사태와 파인시티 불완전판매 문제 등으로 감독당국의 철퇴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으며, 신한금융 역시 고객정보 부당 조회 등이 문제로 앞으로 있을 징계 처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성공한 직장인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금융지주 CEO들이 최근 도덕적 해이의 표본이 됐고, 동시에 무능한 경영자로 낙인 찍혔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 뿌리 깊은 '관치'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이처럼 금융권 CEO의 초라한 말로가 반복되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도입한 금융지주 체제 개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현 금융지주 체제가 오히려 '관치금융'을 양산하는 기반이 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궁지에 내몰린 금융기관 CEO를 정권의 희생양으로 보는 옹호론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왼쪽부터) 황영기 전 회장, 강정원 전 행장, 어윤대 전 회장, 임영록 회장.

 

정권 교체 시 마다 휘둘린 '금융 권력'

 

개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떠나 금융기관 CEO의 경질 문제는 정권 교체기마다 등장한 단골 이슈 중 하나다. 일례로 KB의 경우 임기를 다 채운 CEO가 이상할 정도이고, 타 금융지주 CEO 역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부유일기의 신세로 전락했다.

 

KB의 경우 '관치'에 휘둘리는 고질적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 대표적인 금융기관으로, 최근 임영록 KB지주 회장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중징계 통보를 받음에 따라 역대 수장 5명 모두가 제재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이에 앞서 KB 수장을 역임한 황영기 회장, 강정원 은행장, 어윤대 회장 모두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았는데, 이중 황 회장과 강 전 행장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불명예 퇴진을 감수해야 했다.

 

과거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의 합병 이후 초대 통합 은행장을 역임한 김정태 전 행장은 당시 3연임에 시도했지만, 2004년 임기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민카드 합병과 관련해 회계기준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까지 은행장에게 내려진 최초의 '문책경고' 였다.

 

우리금융 회장 출신인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도 2008년 9월 KB금융 지주회사 출범과 함께 화려하게 금융권으로 복귀했지만, 임기 1년 만에 직무정지 상당의 징계를 받고 불명예 퇴진을 스스로 선택해야만 했다.

 

우리은행 회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파생상품 투자에서 1조원 규모의 손실을 냈다는 이유에서다. 황 회장은 손실을 낸 IB투자부문 확대 역시 넓게는 당국의 방침에 따른 것이라 맞섰고, 결국 이 같은 주장이 금융당국으로부터 받아들여졌지만 이미 무능한 경영자로 낙인찍힌 이후였다.

 

2009년 9월 황 전 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과 은행장을 겸임한 강정원 행장 역시 관치의 통제 하에 있는 지주사 회장의 한계를 보여준 사례 중 하나다. 당시 강 회장은 '외국계 은행 출신의 정통 뱅커'로 금융권의 이목을 사로잡았지만, 부실대출과 카자흐스탄 BCC은행 투자손실, 이사회 허위보고 등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MB정부 4대 천왕으로 불리던 어윤대 전 회장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10년 7월 취임 때부터 MB정부의 4대 천왕으로 불리며 최고 실세로 군림했지만 정권 말기 그 기세가 급격히 꺾였고,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정권의 집중 타깃이 돼 뭇매를 맞아야 했다.

 

KB 출신 전임 CEO 4명 중 3명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려하게 깜짝 등장했다가 정권 교체와 함께 무수한 뒷말을 남긴 채 쓸쓸히 사라진 것이다.

 

▲(왼쪽부터) 강만수 전 회장, 김승유 전 회장, 이팔성 전 회장.

 

금융당국 '무리한 제재' 논란 확산

 

문제는 임영록 현 회장을 향한 금융당국의 징계도 '관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금융권의 중론이라는 데 있다. 주전산기 교체 사업을 제외한 사안이 임 회장과 직접 연관이 없지만, 금감원이 무리수를 감행하면서까지 감독책임을 물어 중징계로 몰아간다는 시각에서다.

 

특히 이번 KB 사태의 경우 감독당국이 수차례에 걸쳐 제재 결과 발표를 연기해 수많은 루머를 양산하면서도, 처음 강조한 '중징계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금융권 CEO의 실질적인 과실 여부를 떠나 속칭 '금융기관 길들이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MB정부 시절 4대 천왕 역시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다 금융 당국의 퇴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내어준 사례 중 하나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과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도 차기 정권 출범 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팔성 우리금융지주 회장도 결국 본인을 겨냥한 금융 당국의 칼날을 피해 자리를 비워야 했다.

 

특히 이팔성 회장의 경우는 국내 최초로 금융기관 말단 행원부터 시작해 금융그룹 회장 자리에 오른 인물로 유명하다. 오로지 정권의 낙하산에 기대 자리를 꿰찼던 타 금융지주 CEO와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이 회장 역시 금융권 CEO 자리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관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씁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물론 역대 금융지주 CEO 모두가 정권의 압력에 억울하게 쫓겨난 것처럼 포장되는 것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권력의 이동에 의해 금융기관 CEO의 업적과 과실이 뒤바뀌는 일은 특히나 더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상당수 금융지주회사의 지배구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 CEO 자리가 정권의 전리품으로 인식돼 온 게 현실"이라며 "단순히 협의의 지배구조 정렬에만 관심을 두기 보다는 소유규제를 포함한 보다 광의의 소유·지배구조에 대한 정책 처방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사회를 중심으로 한 협의의 지배구조를 설계하는 것 못지않게 대주주와 관련 임원이 규제를 위반했을 때의 시정조치의 유효성을 제고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지배구조상 문제로 분쟁이 발생해 사회적 비용을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남규 기자 ngk@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