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조선 김남규] “본사 지침상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최근 M&A 소식이 발표된 다국적 스토리지 업체의 국내 지사장과 전화통화에서 들은 답변의 일부다. 미국발 M&A로 인해 국내 지사의 존폐여부 조차 불확실해지면서, 다국적 IT기업 지사장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2000년도 중·후반까지 다국적 IT기업은 선호하는 일터였고, 다국적 IT기업의 지사장 역시 꽤나 성공한 샐러리맨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는 전문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지사장을 꿈꿨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조직 내 수장으로서 리더십을 보여주기는커녕 본인의 거취조차 정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일부 지사장의 경우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국내 조직을 보존하지 못한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례로, 델과 EMC의 합병 소식이 전해질 당시 한국EMC 측은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본사 CEO의 발표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최근 넷앱에 인수된 솔리드파이어 역시 국내에서 아직까지 공식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들 기업의 국내 지사장 역시 외신을 통한 M&A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본사로부터 아무런 소식을 사전에 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식입장 발표를 자제하라는 본사 지침을 떠나, 사안을 인지하고 대응할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다국적 IT기업 지사장의 입지가 좁아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내 IT 시장 규모 자체가 축소되는 가운데, 한국 지사의 상당수가 내수 영업이나 제품 후방 지원에 그치고 있다. 본사에 실적을 보고하는 역할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은 것이다.
 
특히 다국적 IT기업의 업무 프로세서 역시 지사장의 입지를 좁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상당수 IT기업은 각 파트별 업무 실적을 아태지역이나 미국 본사의 상급자에게 직접 보고하는 구조를 택하고 있어, 내부 조직원보다 본사 직속상관의 눈치를 더 봐야 하기 때문이다.
 
IT업계 한 마케팅 임원은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도 아태지역 내 마케팅 상급자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국내 지사장이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며 “아태지역 임원이 인사권을 갖고 있어 더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조직 내 구성원 간 협업 기회가 적은 만큼, 국내 시장 공략을 위한 다국적 IT 기업 지사장의 메시지가 고객과 시장에 전달되기 어렵다. 또한, 임직원을 대상으로 지사장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쉽지 않음은 물론이다.
 
지난 수년간 국내 스토리지 시장에서 업계 1위를 지켜온 다국적 IT기업의 지사장이 델의 EMC 인수와 맞물려, 분사를 앞둔 HPE의 신임 대표직에 관심을 보인 것은 다국적 IT기업 국내 지사장의 좁아진 입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형적인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강력한 리더십을 상실한 외국계 IT기업 지사장이 이끄는 조직이 발전적인 지향점을 찾을 리 만무하다. 특히 국내 고객이 지향점을 잃은 다국적IT 기업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얼마만큼 신뢰를 가질지 의문이다.

김남규 기자 ngk@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