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마니아들의 전유물이었던 기계식 키보드가 요즘처럼 대중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스위치 관련 디자인 특허가 만료된 이후 저렴하면서도 쓸만한 호환 스위치가 나오면서 소수에 불과했던 기계식 키보드의 종류와 수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게이밍 기어(게임 특화 주변기기) 열풍이 불면서 기존의 저가 멤브레인 키보드와 비교해 ▲높은 내구성과 ▲빠르고 정확한 반응성 ▲무한 동시 입력 ▲스위치의 종류에 따른 경쾌한 손맛 ▲키캡 교체를 통한 커스터마이징 등의 장점을 가진 기계식 키보드는 순식간에 게이밍 기어 시장의 핵심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앱코의 정전식(무접점) 키보드 ‘해커 K965P’ / 최용석 기자
앱코의 정전식(무접점) 키보드 ‘해커 K965P’ / 최용석 기자
다양한 기계식 키보드 제품을 선보였던 앱코가 최근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기계식 키보드보다 더욱 고급으로 취급받는 정전식 키보드 '앱코 해커(Hacker) K9 시리즈'를 선보이며 정전식 키보드의 대중화에 나선 것이다.

앱코 해커 K9 시리즈는 색상과 키 압력, 키캡의 재질, LED 백라이드 옵션에 따라 총 9가지 모델로 나뉜다. 이번에 리뷰한 제품은 가장 기본적인 구성에 PBT 키캡을 채택한 '앱코 해커 K965P'다.

불필요한 장식 요소는 최소화한 심플하고 담백한 디자인을 채택했다. / 최용석 기자
불필요한 장식 요소는 최소화한 심플하고 담백한 디자인을 채택했다.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의 외관 디자인은 '고급 키보드'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심플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장식적인 요소는 물론 테두리마저 거의 없는 단순한 베젤 리스(bezel less) 디자인에 클래식 키보드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화이트&그레이 색상의 키캡은 다소 고전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낸다.

앱코 해커 ‘K9 시리즈’는 정전식 키보드 중에서는 처음으로 스위치가 상판 위로 노출된 ‘비키 스타일’ 디자인을 채택했다.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 시리즈’는 정전식 키보드 중에서는 처음으로 스위치가 상판 위로 노출된 ‘비키 스타일’ 디자인을 채택했다.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를 비롯한 'K9 시리즈' 전 모델은 현재 시중에 출시된 정전식 키보드 중에서는 최초로 스위치가 상판 위로 노출된 비키(VIKI) 스타일을 채택했다. 비키 스타일 디자인의 장점은 스위치가 상판 아래로 매몰된 일반 키보드에 비해 먼지나 이물질이 키캡 사이에 들어가도 청소 및 제거를 훨씬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물이나 음료를 키보드 위에 쏟아도 키 사이사이로 바로 흘러내려 배출되는 생활방수 기능도 제공한다. PC를 사용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가 바로 키보드에 물이나 음료 등을 쏟는 것임을 고려하면 매우 유용한 장점인 셈이다. 물론 완전 방수는 아닌 만큼 물속에 완전히 잠기면 침수되어 고장 나는 것은 일반 키보드와 다를 것 없다.

스위치 속이 그대로 보이는 투명 상판을 채택했다. 스위치의 모양과 구조 자체가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와 전혀 다르다. / 최용석 기자
스위치 속이 그대로 보이는 투명 상판을 채택했다. 스위치의 모양과 구조 자체가 일반적인 기계식 키보드와 전혀 다르다. / 최용석 기자
키캡 바로 아래 상판 하우징은 특이하게 투명한 소재를 사용해 스위치 내부가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마치 멤브레인이나 플런저 키보드처럼 상판 자체가 스위치와 일체화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판 구조 역시 앱코 K9 시리즈 모두 공통으로 가진 특징이다.

겉으로는 알 수 없지만 스위치의 구조는 일반적인 기계식 스위치와는 전혀 다르다. 일반 기계식 스위치는 누를 때마다 내부의 금속 접점이 맞닿아 신호를 만드는 구조인 데 반해, 정전식 스위치는 눌렀을 때 정전 용량의 변화에 따라 신호를 만들어내는 구조다.

앱코 K9 시리즈는 일반 기계식 스위치와는 구조와 작동 방식이 다른 ‘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를 채택했다. / 앱코 제공
앱코 K9 시리즈는 일반 기계식 스위치와는 구조와 작동 방식이 다른 ‘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를 채택했다. / 앱코 제공
이러한 스위치의 정식 명칭은 '정전용량 무접점 스위치'이며, 줄여서 '정전식 스위치' 또는 '무접점 스위치'라고 부른다. 스위치가 끝까지 닿지 않아도 신호가 인식되어 입력되기 때문에 다른 방식의 키보드에 비해 더욱 부드럽고 손끝에 가해지는 충격이 더욱 작다. 키를 완전히 누르지 않고 3분의 2정도만 눌러서 키를 입력하는 소위 '구름 타법'도 가능하다.

기계식 키보드와 비교하면 걸리는 느낌 없이 쑥 눌러지는 '리니어 방식'(흑축 또는 적축)과 비슷하지만, 구조적인 차이점으로 인해 실제 사용하는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일반적인 멤브레인 방식이나 기계식 키보드에 비해 훨씬 가볍고 부드러운 타건감을 제공한다. / 최용석 기자
일반적인 멤브레인 방식이나 기계식 키보드에 비해 훨씬 가볍고 부드러운 타건감을 제공한다.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의 타건감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는 듯한 느낌이다. 순수하게 스프링의 반발력으로만 키를 누르는 압력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살짝 걸리는 듯한 느낌이 있는 일반 멤브레인이나 기계식 키보드와는 다른 매우 부드러운 타건감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특이한 타건감은 정전식 키보드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의 특징이다.

또한, 스위치의 종류에 상관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소음을 가진 기계식 키보드와 달리 멤브레인 키보드 수준의 정숙함도 제공한다. 일반 기계식 키보드의 타건음이 '타타닥'하는 느낌이면 앱코 해커 K965P는 '도도독' 하는 느낌이다.

덕분에 소음 문제로 사무실이나 공개된 장소에서 쓰기 힘든 기계식 키보드와 달리 어디서든 조용하게 남들을 방해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 앱코 해커 K965P 모델의 경우 키 압력은 55g이지만, K9 시리즈 다른 모델에는 더욱 가볍고 부드러운 키 압력 45g인 모델도 있다.

일반 ABS 소재 키캡에 비해 내구성이 더욱 뛰어난 PBT 소재 키캡 / 최용석 기자
일반 ABS 소재 키캡에 비해 내구성이 더욱 뛰어난 PBT 소재 키캡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는 일반적인 키보드에서 쓰는 ABS 소재가 아닌 PBT 소재를 사용한 키캡을 사용했다. PBT 소재는 일반 ABS 소재보다 훨씬 견고하고 마모에도 강하며, 쉽게 변색하지도 않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앱코 해커 K965P에 사용된 키캡은 1.5mm 두께로 두툼하게 사출되어 키 자체의 질감이 훨씬 묵직하다.

또한, 염료 승화 방식으로 새겨진 키캡 각인은 키캡의 매끈한 표면 질감을 유지하면서 오래 사용해도 색이 변하거나 희미해지지 않는 내구성을 제공한다. 참고로, 앱코의 이번 '해커 K9' 시리즈 중에서 모델명이 '5P'로 끝나는 제품(K965P, K975P, K985P 등)이 PBT 소재 키캡을 채택했으며, 다른 모델은 일반 ABS 재질의 키캡을 사용했다.

키캡이 체리 MX 방식 기계식 스위치의 키캡과 호환되어 사용자가 원하는 키캡으로 교체하는 ‘키캡 놀이’가 가능하다. / 최용석 기자
키캡이 체리 MX 방식 기계식 스위치의 키캡과 호환되어 사용자가 원하는 키캡으로 교체하는 ‘키캡 놀이’가 가능하다.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의 또 다른 특징은 일반 기계식 키보드처럼 '키캡 놀이(키캡 커스터마이징)'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본래 정전식 스위치의 원조인 일본 토프레 사의 '리얼포스' 시리즈의 경우 전용의 키캡만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되어 맘에 드는 키캡만 교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반면 앱코 해커 K965P에 채택된 정전식 스위치는 체리 MX 방식과 호환되는 중앙 십자 축 방식을 사용해 시중에 출시된 다양한 형태의 교체용 키캡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일부 상태 표시가 필요한 키의 LED는 각 키의 밑에서 백라이트처럼 켜진다. / 최용석 기자
일부 상태 표시가 필요한 키의 LED는 각 키의 밑에서 백라이트처럼 켜진다.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의 경우 비록 상위 모델처럼 화려한 LED 기능은 없지만, 최근 출시되는 게이밍 키보드의 기본 기능은 대부분 지원한다. 무한 동시 입력이나 윈도 키 잠금 기능은 물론 탐색기나 웹 브라우저, 계산기 등 많이 쓰는 애플리케이션 실행과 멀티미디어 제어 단축키 기능을 제공한다.

또 키보드와 함께 제공되는 K9 시리즈 전용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면 기본 단축키의 기능을 바꾸거나 매크로를 작성해 특정 키에 저장할 수도 있다.

USB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노트북과 맥(Mac)에서도 바로 사용할 수 있다. / 최용석 기자
USB 인터페이스를 사용해 노트북과 맥(Mac)에서도 바로 사용할 수 있다. / 최용석 기자
인터페이스는 노트북은 물론 맥(Mac)에서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USB 인터페이스를 채택했다. 신호 노이즈를 줄이기 위한 금도금 커넥터와 페라이트 코어(노이즈 필터)를 채택했으며, 두툼한 케이블은 패브릭 처리로 마감해 쉽게 단선되거나 꼬이는 것을 방지했다.

사용하지 않을 때 제품 보호를 위한 투명 커버를 제공한다. / 최용석 기자
사용하지 않을 때 제품 보호를 위한 투명 커버를 제공한다. / 최용석 기자
특히 키보드의 바닥면은 사용 환경에 따라 케이블의 노출 방향을 바꿀 수 있게 설계되어 있어 사용 시 편의성을 더해준다. 미끄럼 방지 고무 패드는 책상 위에서 키보드가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준다.

키보드 외에 구성품으로는 향후 '키캡 놀이'를 위한 키캡 리무버와 청소용 솔이 기본 제공되며, 사용하지 않을 때 먼지나 이물질 등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한 투명 커버를 제공한다.

기본 구성품에 포함된 청소용 솔(왼쪽)과 키캡 리무버 / 최용석 기자
기본 구성품에 포함된 청소용 솔(왼쪽)과 키캡 리무버 / 최용석 기자
앱코 해커 K965P는 해커 K9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보다 비싼 10만원대(일반 ABS 키캡인 K960은 9만원대)의 가격으로 출시됐다. 그래도 원조 격인 일본산 정전식 키보드가 보급형이 최소 15만원대고 고급형은 LED 백라이트도 없는 제품이 30만원을 훌쩍 넘는 것을 고려하면 저렴한 가격이다.

사용자에 따라서는 앱코 해커 K9 시리즈와 같은 정전식 스위치 특유의 타건감이 오히려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찰칵거리는 특유의 작동음과 반동으로 인한 경쾌한 타건감으로 인기가 많은 기계식 청축 스위치 키보드를 쓰다가 앱코 해커 K965P 같은 정전식 키보드를 쓰게 되면 금방 질리기 쉽다.

키를 누르면 저항 없이 쑥 들어가고, 손끝에 반동도 거의 없으며, 찰칵하는 고유의 작동음도 거의 없고 조용하게 '도도독'하는 느낌만 나다 보니 '타자 치는 재미'가 훨씬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존 키보드에 비해 더욱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손맛과을 제공하는 앱코 K9 시리즈는 문서 작업이 많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키보드다. / 최용석 기자
기존 키보드에 비해 더욱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손맛과을 제공하는 앱코 K9 시리즈는 문서 작업이 많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키보드다. / 최용석 기자
그러나 손끝에 부담을 주지 않아 장시간 사용해도 손에 무리를 주지 않는 데다, 다른 방식의 키보드에 비해 더욱 부드럽고 빠르며 민감한 것이 바로 정전식 키보드의 장점이다. 문서 업무가 많은 사무직이거나, 작가 또는 기자처럼 키보드로 글을 많이 쓰는 이들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다.

평소 키보드를 쓸 일이 많으면서 기존의 멤브레인이나 기계식 방식 키보드와는 또 다른 '손맛'을 맛보고 싶다면 K965P를 비롯한 앱코의 K9 시리즈 정전식 키보드는 꼭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제품이다. 행여 관심이 있다면 말로는 설명이 어려운 만큼 가까운 오프라인 매장을 통해 반드시 직접 체험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