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자동차가 주력 SUV 신형 XC60을 내놨다. 볼보차 내에선 가장 많이 판매되는 차이기도 하다. 실제 XC60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유럽 경쟁시장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 제품의 차세대 디자인은 한국인 디자이너 이정현씨가 맡았다. 북유럽 색채가 강한 볼보차 브랜드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때문에 이정현씨와 그가 그린 XC60은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스스로를 '잡종(하이브리드)'라고 표현한 그를 신형 XC60의 출시행사가 열린 서울 그랜드하얏트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만났다.

이정현 볼보자동차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 볼보차 제공
이정현 볼보자동차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 볼보차 제공
이정현 디자이너는 다른 디자이너처럼 어려서부터 '미술'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것. 대학 2년을 마치고 입대, 군생활 중 남자라면 흔히하는 '군 제대 후엔 뭘하지?'라는 고민이 그를 스웨덴으로 이끌었다. 전공 관련 직업보다는 자기가 정말로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자동차를 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유학을 결심한 것도 그때였다.

그렇게 스웨덴 생활도 벌써 10년이다. 이전에는 한국에서 30년을 살았기 때문에 자기를 '하이브리드(잡종)' 디자이너라고 부른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스웨덴의 미적감각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번 XC60 디자인에도 그런 잡종적인 성격이 강하게 반영됐다.

이정현 디자이너가 XC60의 외장 디자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바로 '선'이다. 그 중에서도 센터라인은 눈으로 드러라는 건 아니지만 제품 전체의 균형을 잡는다는 점에서 비중이 크다. XC60은 개발 과정에서부터 비율에 대한 고민이 컸고, 멀리서도 볼보차임을 한눈에 알게 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뤄졌는데, 이 센터라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까이서는 '면의 질감'에 신경 썼다. 마치 액체금속을 연상케 하는 것이 특징이다. 면의 형태는 자동차의 반사광과 그림자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가볍지 않다. 존재감과 이어지는 부분이어서다. 섹시하면서도 우아한 질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정현 디자이너가 일하고 있는 볼보 디자인 센터는 자유스러움을 창의성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디자이너 숫자가 많지도 않아 가족적이며, 결정권자에서 신입까지 폭넓은 의견개진이 가능할 정도로 열린 분위기다. 인턴이 제시한 의견이라도 타당성이 있다면 양산 디자인에 적용되기도 한다.

이정현 볼보자동차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 볼보차 제공
이정현 볼보자동차 익스테리어 디자이너. / 볼보차 제공
그 때문일까? 기계공학을 전공한 이례적인 경력의 소유자도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곳이 바로 볼보차다. 특히 자동차 디자인은 필연적으로 엔지니어링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데, 이정현 디자이너가 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 가령 공기역학에 관련된 것은 기술적인 측면과 디자인이 항상 부딪히는 분야지만, 공기역학을 이해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는 양쪽에서 균형을 잡기가 편하다. 대학 때 배운 것만으로도 협업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다만 절대로 타협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안전이다. 디자인에 있어 안전에 방해가 된다면 기꺼이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볼보차다. XC60의 경우 보행자가 차 전면과 부딪혔을 경우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측면을 따라 빠져나갈 수 있게끔 그려졌다. 안전이라는 볼보의 가치가 십분 발휘된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패밀리룩을 강조하는 요즘 디자인 세태 속에서 볼보 디자인이 던지는 화두는 '차별성'이다. 한 가족을 예로 들면 조부모와 부모, 자녀들이 모두 비슷한 외견(패밀리룩)을 가졌지만, 각각의 개성은 다르다. 볼보차 또한 90시리즈(플래그십 라인), 60시리즈(주력 제품군), 40시리즈(엔트리 라인업) 모두 추구하는 캐릭터가 다르다. 때문에 소비자 선택폭이 굉장히 넓고, 프리미엄 치고 지루하지 않은 디자인이라는 게 이정현 디자이너의 생각이다. 현재 그가 그리고 있는 V40의 차세대 버전 또한 XC6가 가진 디자인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형태의 차가 주는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정현 디자이너가 정의하는 디자인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상에 자기와 취향이 맞지 않은 디자인은 있어도, 나쁜 디자인은 없다고 전한다. 어떤 디자인이든 디자이너의 고뇌와 눈물, 생각이 담겨있고, 그런 부분에서 모든 디자인을 존경한다는 이정현 디자이너는 본인의 장점으로 무엇이든지 흡수하려는 자세를 꼽았다. 양산 디자인에 있어서도 디자이너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며, 다시 한번 잡종(하이브리드)적인 본인의 성향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엘리트 디자인 코스를 밟지 않은 그가 가진 경쟁력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볼보 디자인의 장점을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 나오는 차는 마치 비행기 조종석에 앉은 것처럼 운전자에게 복잡한 조작을 강요하는 일이 잦은데, 볼보의 경우는 처음부터 아예 그것을 배제한다. 고급스럽고 편안한 북유럽 쇼파에 앉은 것 같은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 바로 볼보차의 디자인이고, 기계와 기술이 아닌 사람이 중심된 프리미엄이 볼보가 지향하는 디자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말을 듣고 XC60을 보니 정말로 그래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