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주도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슈퍼사이클(장기호황) 국면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를 두고 다양한 관측이 나온다.

반도체 업계는 대체로 2018년까지 메모리 반도체 공급이 수요에 못 미치며 업황 호조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2019년 이후 전망은 다소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2018년 정점을 찍고 안정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다른 한편에서는 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인공지능(AI) 기술 발전 시기에 발맞춰 제 2의 슈퍼사이클이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삼성전자의 10나노급 D램.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의 10나노급 D램. / 삼성전자 제공
◆ 없어서 못 파는 메모리 반도체…모바일이 끌고, 클라우드 서버가 밀고

D램·낸드플래시로 대변되는 메모리 반도체는 최근 몇 년간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 수요 폭증에 힘입어 지속적인 성장기를 맞았다. D램은 데이터 처리속도가 빠르지만, 전원 공급이 중단되면 지워지는 메모리가 임시 작업공간으로 쓰인다. 낸드플래시는 전원 공급이 끊겨도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특성상 컴퓨터나 모바일 기기의 데이터 저장 공간으로 사용된다.

스마트폰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1~2기가바이트(GB) 램에 16~32GB 저장공간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화면 크기가 커지고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양이 늘어나며 스마트폰이 컴퓨터 성능에 못지 않게 발전했다. 최신 스마트폰의 경우 램 6~8GB, 저장공간 256~512GB에 이르는 사양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2016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배경에는 기업용 수요 증가가 크게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가 대중화되면서 데이터센터 내 서버의 양적·질적 팽창이 뒤따랐다는 것이다.

구글·아마존·페이스북 등 전 세계 수억명의 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IT 기업은 지속적으로 데이터센터를 확장했다. 각종 가전이나 센서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IoT 서비스의 확산도 클라우드 기업의 서버 증설을 부추겼다.

D램 시장은 과거 치열한 치킨게임 끝에 현재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세 개 회사의 과점 체제로 구성됐다. 폭증하는 D램 수요 대비 공급량이 크게 못 미치자 시장 공급가격이 일년새 두 배나 뛰었다. 낸드플래시는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그렇다고 공급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 시장 주요 업체로는 삼성전자·도시바·웨스턴디지털·마이크론·SK하이닉스·인텔 등이 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이끈 첨병은 D램이지만, 성장 잠재력은 낸드플래시가 더 높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중론이다.

SK하이닉스의 72단 3D 낸드플래시와 이를 적용해 만든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 / SK하이닉스 제공
SK하이닉스의 72단 3D 낸드플래시와 이를 적용해 만든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 / SK하이닉스 제공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는 2017년 D램 반도체 시장이 74%의 기록적인 성장세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78%의 성장율을 보인 1994년 이래 23년 만에 가장 큰 폭의 성장율이다. 시장 규모도 단일 제품으로는 최대인 720억달러(81조4300억원)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낸드플래시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44% 늘어난 498억달러(56조3300억원)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업황 호조에 힘입어 매 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우고 있다. 삼성전자의 3분기 잠정실적은 매출 62조원, 영업이익 14조5000억원이며, 전체 영업이익의 3분의 2인 10조원쯤은 반도체 사업에서 벌어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26일 실적발표를 앞둔 SK하이닉스의 경우 3분기 영업이익이 3조8000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2016년 한 해 동안 영업이익 3조2767억원을 기록했는데, 2017년에는 한 분기만에 이를 달성한 셈이다.

◆ '전자산업의 쌀'에서 4차 산업혁명 '게임 체인저'로 급부상

빅데이터·IoT·AI 등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첨병으로 주목받는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도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장기화를 관측하는 이유 중 하나다.

머신러닝(기계학습)으로 불리는 AI의 데이터 학습 알고리즘은 높은 성능의 컴퓨팅 파워를 필요로 한다. 반도체 집적회로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통용되던 시절에는 더 높은 컴퓨팅 파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버 용량을 늘리거나 더 높은 성능의 부품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반도체 미세공정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스케일 업 방식으로는 비약적인 컴퓨팅 파워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그 대안으로 메모리 중심 컴퓨팅이 부상했다. 메모리는 그동안 중앙 처리장치(CPU)가 성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하지만 거대한 메모리 풀을 기반으로 CPU를 병렬로 연결하면 머신러닝과 같은 고도의 연산에도 병목현상이 발생하지 않고 빠른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다. 주요 IT 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된 메모리 중심 컴퓨팅 트렌드는 메모리 수요 폭증을 견인했다. 그 결과 음성비서, 번역, 챗봇 등 AI 서비스가 몇 년새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AI나 슈퍼컴퓨터와 같은 수요를 위한 차세대 메모리로 주목받는 것 중 하나가 고대역폭 메모리(HBM)다. HBM은 초고집적 설계 기술을 적용해 기존 금선을 이용한 D램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대폭 끌어올린 메모리 반도체를 말한다. HBM은 같은 용량의 D램보다 8배 빠른 전송 속도를 구현하고, 같은 크기라면 용량과 소비전력 모두 2배 끌어올릴 수 있다. 현재 삼성전자가 2017년 하반기 차세대 8GB HBM D램을 양산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8GB HBM2 D램. /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의 8GB HBM2 D램. / 삼성전자 제공
자율주행차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기회로 꼽힌다. 2020년 이후 본격적인 자율주행 시대가 오면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에 탑재되는 메모리 반도체 용량이 크게 증가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내비게이션 화면을 통해 정보와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제공하는 인포테인먼트 수요도 급증할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은 ADAS에 탑재되는 낸드플래시 평균 용량이 현재 대당 8GB 수준에서 2020년이면 128GB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중국이 몇 년 전부터 반도체에 공격적인 투자를 집행하면서 2019년부터 차이나 리스크가 대두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중국 정부는 2016년 자국 반도체 산업 활성화를 위해 향후 10년간 170조원에 달하는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는 중국이 수율 등 반도체 공정 기술력을 한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까지 5년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22년이면 한국이 주도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올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