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젠(Zen)’ 아키텍처와 ‘라이젠(RYZEN)’ 프로세서로 x86 프로세서 시장에서 기사회생한 AMD가 이제는 단순히 회생을 넘어 ‘x86 프로세서의 2인자’로서 이전의 명성과 영향력 찾기에 나선다.

2017년 2월 ‘젠’ 아키텍처와 이에 기반을 둔 ‘라이젠’ 프로세서를 발표한 이후 CPU 시장에서 AMD의 행보는 거침없다. 성능과 효율, 가격 대비 성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인정받은 AMD는 데스크톱용 ‘라이젠’을 시작으로 노트북용 제품군인 ‘라이젠 모바일’, 전문가용 HEDT 제품군인 ‘라이젠 스레드리퍼(Threadripper)’, 서버용 제품군 ‘에픽(EPYC)’ 등으로 젠 아키텍처 기반 라인업을 빠르게 확대했다.

AMD의 서버 및 데이터센터용 에픽(EPYC) 프로세서. / AMD 제공
AMD의 서버 및 데이터센터용 에픽(EPYC) 프로세서. / AMD 제공
때마침 시장 상황도 AMD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올해 들어 AMD가 분야별 라인업을 모두 확충한 가운데, 2018년 하반기로 들어서면서 경쟁사의 CPU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 일반 PC 시장은 물론, 기업용 서버 시장에서도 AMD 프로세서 제품들이 자연스럽게 대안으로 떠올랐다. 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상황이다.

AMD가 좋은 분위기를 타고 있는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만은 아니다. 그만큼 AMD에서 내놓는 제품이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만한 경쟁력을 갖추었고, 이를 인정하는 고객들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2018년 들어 서버 시장에서의 점유율 상승이 고무적이다. 과거 AMD는 서버 시장에서만 30%가 넘는 점유율로 인텔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잇따른 후속 제품의 실패와 인텔 제품들의 급격한 성능 향상으로 AMD 제품은 아예 서버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근근하게 명맥을 이어왔던 개인용 프로세서와 달리, AMD의 서버용 ‘에픽’ 프로세서는 아예 제로부터 다시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도 2017년 6월에 출시한 지 고작 1년여 만에 시장에 안착하고 빠르게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HPE와 델 EMC 등 기업 IT 분야의 손꼽히는 서버 제조사들이 AMD 에픽 프로세서를 탑재한 제품군을 점차 늘리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등 클라우드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들도 에픽 기반 플랫폼 도입에 적극적이다. AMD의 약진은 보수적이고 까다로운 기업 IT 시장에서도 꽤 드문 일이다.

스콧 에일러(Scott Aylor) AMD 데이터센터 및 임베디드 솔루션 비즈니스 그룹 총괄 부사장은 13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2017년 한 해 동안 상위 15개 시스템 파트너사가 AMD 에픽 프로세서를 채택한 서버 플랫폼을 50종 이상 선보였다"며 "이는 제품 출시 1년여 만에 거둔 것 치고는 대단한 성과다"고 평했다.

스콧 에일러 AMD 데이터센터 및 임베디드 솔루션 비즈니스 그룹 총괄 부사장. / AMD 제공
스콧 에일러 AMD 데이터센터 및 임베디드 솔루션 비즈니스 그룹 총괄 부사장. / AMD 제공
에일러 부사장은 에픽 프로세서가 최근 기업 IT 시장의 트렌드와 잘 맞아떨어진 것이 그러한 성과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엔터프라이즈 호스팅 및 SaaS 분야,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 클라우드 및 가상화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이 대거 도입되면서 소프트웨어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지만, 하드웨어의 발전은 둔화하면서 효율은 떨어지고 비용만 상승했다는 것.

그러한 상황에 동일 규모의 서버 기준으로 더 많은 프로세서 코어를 탑재해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고, 도입 비용은 훨씬 저렴해 경제성까지 갖춘 에픽 프로세서 플랫폼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고 그는 강조했다. 즉 뛰어난 ‘가격 대비 성능’이 에픽 프로세서의 인기 요인이라는 말이다.

또한, 올해 초부터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는 ‘멜트다운(Meltdown)’, ‘스펙터(Spectre)’, ‘포어섀도우(Foreshadow)’ 등 민감한 CPU 관련 보안 이슈에서 경쟁사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에픽 프로세서의 도입이 늘고 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단순히 ‘가성비’만 좋은 것은 아니다. 이제는 기술적으로도 오히려 선두인 인텔을 추월할 기세다. 인텔 프로세서 공급 부족의 이유, 즉 차세대 10나노미터(㎚) 공정 도입이 내년인 2019년 이후로 미뤄진 것과 달리, AMD의 차세대 7㎚ 공정 도입은 차질 없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에일러 부사장은 "당초 예정대로 7㎚ 공정 기반 에픽 프로세서 제품군은 2019년에 순조롭게 출시되고 시장에 선보일 수 있을 것이다"며 "이제야 에픽 프로세서가 시장에 자리를 잡고 막 성장하는 시기인 만큼 구체적인 목표치는 밝히기 어렵다. 다만, 다수의 제조사와 기업에서 에픽 플랫폼의 채택이 빠르게 늘고 있는 만큼 내년쯤 되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리사 수 AMD CEO는 11일 CNBC와의 인터뷰를 통해 콘솔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드러냈다. / CNBC 영상 갈무리
리사 수 AMD CEO는 11일 CNBC와의 인터뷰를 통해 콘솔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드러냈다. / CNBC 영상 갈무리
AMD의 약진은 개인용 PC와 기업용 서버 시장에서만이 전부는 아니다. AMD 재도약의 실질적인 발판이 되었던 게임 콘솔(비디오 게임기)용 프로세서 시장에서도 AMD의 ‘독주’는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전 세계 게임 콘솔 시장의 양대 축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의 차세대 제품도 AMD의 커스텀 APU(CPU와 GPU가 통합된 프로세서)가 탑재될 전망이다.

리사 수(Lisa SU) AMD CEO는 11일(현지시각) CN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소니 및 MS와 함께 게임 콘솔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그들은 ‘비밀스러운 소스(secret sauce)’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그가 말하는 ‘비밀스러운 소스’가 소니 및 MS의 차세대 게임 콘솔인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AMD의 미래가 완전히 장밋빛 전망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전 세계 프로세서 시장 점유율은 20%대에서 턱걸이 중이고, 서버 시장 진출도 이제 막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최대의 경쟁사인 인텔도 언제든 다시 뒤집을 수 있는 저력이 있는 만큼, 시장을 호락호락 내어주지는 않을 전망이다. 또 다른 핵심 부문인 GPU 쪽은 경쟁사에 밀려 시장에서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2018년 9월 현재 시장 상황은 AMD 입장에서 시장 점유율을 더욱 끌어올리고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과, 그에 맞춰 적재적소의 포트폴리오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도 없는 찬스를 맞은 AMD가 과거의 영광을 어느 정도 재현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