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동차 업계가 전동화 전환을 빠르게 추진하고 나섰다. 날로 엄격해지는 각국의 배출가스 규제 속에 미래 자동차 산업의 향배가 전기동력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 회사는 전기차 전용 브랜드까지 만들어가며 시장 선점을 위한 청사진 제시에 나섰다. 반면 현대·기아차는 빠르게 전동화 전환에 착수했음에도 ‘전기차 전용 브랜드’가 보이지 않아 대응이 더디다는 분석이 나온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전기차 전용 브랜드를 만드려는 이유는 특유의 ‘상징성’ 때문이다. 미래 기술의 하나로 꼽히는 전기차 시장에 대표 이미지를 심겠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쉽게 머리 속에 떠올리는 전기차 하면 생각나는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 전기차 대명사 ‘테슬라’…시장 장악하려면 브랜드 먼저 알려라

현재 전기차 시장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브랜드는 ‘테슬라’가 꼽힌다. 전기차 시장의 개척자로 불리는 테슬라는 그야말로 전기차를 상징한다. 후속 전기차 스타트업이 모두 ‘포스트 테슬라’를 외치는 것만 봐도 전기차 시장에서의 테슬라 지위는 녹록치 않다.

전기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는 테슬라다. / 테슬라 제공
전기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는 테슬라다. / 테슬라 제공
테슬라는 사업 초기 고성능 전기 그란투리스모(장거리를 편안하게 이동하는 차)에 집중했다. 이후 SUV(모델 X), 전기 세단(모델 3)을 내놓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모델 3의 경우 대량생산에 따른 노하우가 쌓이지 않아 큰 폭의 적자를 보기도 했었으나, 최근 정상 생산 궤도에 오르며 ‘결국 테슬라가 옳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향후 전기 트럭(테슬라 세미)과 소형 SUV(모델 Y) 역시 라인업에 포함한다는 계획이다.

테슬라는 전기차 사업에서 단순히 차량 판매에만 비중을 두지 않는다. 전용 충전시설인 ‘슈퍼차저’를 세계 곳곳에 깔아두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전기차가 성공하려면 전기차 외에도 에너지 공급, 관리, 저장 등 충전 인프라와 전기차 유지보수를 위한 소프트웨어 체계도 중요하다는 게 테슬라 입장이다. 따라서 이런 통합 서비스 전략으로 ‘브랜드’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테슬라가 전기차 선구자로서 각광받자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자동차’는 내연기관이든 전기동력이든 자동차 회사가 제일 잘 만드는데, 그 믿음이 테슬라에 의해 깨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된 탓이다. 서둘러 전기차 전환을 선언한 것은 그 이유다. 지금까지의 100년은 물론, 앞으로의 100년도 자동차는 자동차 회사의 것이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 ‘벤츠 EQ’ ‘폭스바겐 I.D.’ ‘아우디 e-트론’ ‘BMW i’…통합 전기차 브랜드 전략 가동

2016년 메르세데스-벤츠는 파리모터쇼에서 전기차 서브 브랜드 ‘EQ’를 발표했다. EQ는 벤츠 모기업인 다임러의 전기차 사업과 관련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브랜드다. 다양한 전기차를 선보이는 건 물론, 급속충전기 보급, 리튬이온 배터리를 활용한 에너지 저장 사업도 포함한다. 업계는 벤츠가 테슬라를 겨냥해 EQ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전용 브랜드 EQ와 첫 차 EQC. / 벤츠 제공
메르세데스-벤츠 전기차 전용 브랜드 EQ와 첫 차 EQC. / 벤츠 제공
이로써 벤츠는 승용 부문인 메르세데스-벤츠, 고성능 부분인 메르세데스-AMG, 고급차 부문인 메르세데스-마이바흐 등의 브랜드 외에 ‘EQ’라는 새 식구를 맞이하게 됐다. 그만큼 EQ의 그룹내 지위는 높은 편이다. 2017년 벤츠는 EQ 생산시설을 위해 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2년 뒤인 2018년 파리모터쇼에서 EQ의 첫번째 순수 전기차 EQC가 공개됐다. EQ의 디자인 철학인 ‘진보적인 럭셔리’를 적용한 근육질 외관, 낮은 허리선, 확장된 지붕선과 창문 배치 등을 특징으로 한다. CUV(크로스오버 유틸리티 비히클) 형태로, 헤드램프와 그릴을 감싸는 검정 패널, 파란 줄무늬로 EQ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2019년부터 독일 브레멘 공장에서 본격 생산된다.

벤츠는 앞으로 EQA와 EQS 등의 EQ 새 전기차를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EQA는 소형 크로스오버, EQS는 프리미엄 세단 등이다.

폭스바겐은 전기차 전용 브랜드 I.D.를 소개했다. 벤츠 EQ와 마찬가지로 2016년 파리모터쇼에서 출범을 알렸다. 폭스바겐은 I.D.를 두고 "제조기업에서 서비스 기업으로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폭스바겐 I.D.비전. / 폭스바겐 제공
폭스바겐 I.D.비전. / 폭스바겐 제공
이어 I.D.의 여러 제품을 공개했다. 첫 모델인 I.D.를 비롯, 크로스오버 I.D.크로스, 미니버스 I.D.버즈, GT I.D.비전 등을 국제 모터쇼에 속속 내놨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PO)에는 I.D.크루저, I.D.프리러, I.D.스트리트메이트 등의 상표권을 등록했다.

아우디 역시 순수 전기차 브랜드인 e-트론 전략을 가속화한다. 이미 첫 SUV인 e-트론을 출시했다. 여기에 쿠페형 세단 e-트론 스포츠백과 고성능 전기차 e-트론 GT, 여기에 소형 전기차까지 준비 중이다.

아우디는 e-트론 브랜드를 앞세워 2030년까지 글로벌 생산공장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완전히 없앤다는 방침이다. 2025년까지는 e-모빌리티(전기 이동성), 자율주행, 디지털화 등 전략적 개발 부문에 400억유로(51조원)를 투입한다. 이를 통해 10억유로(1조28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창출하겠다는 게 아우디 의도다.

BMW는 일찌감치 i 브랜드를 알리고, 순수 전기차 i3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스포츠카 i8을 판매했다. i는 BMW의 ‘넘버원 넥스트 전략’의 핵심으로 BMW는 i브랜드에 2025년까지 25종의 순수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갖출 예정이다. 또 2021년에는 5세대 전기 동력계와 배터리 기술을 전체 제품에 적용하는 확장 가능한 모듈화 키트도 만들어 낸다는 계획이다.

BMW i넥스트. / BMW 제공
BMW i넥스트. / BMW 제공
BMW i는 이미 iX1에서 iX9의 상표 등록을 마쳤다. X가 BMW SUV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최소 9개의 전기 SUV를 만들 것으로 여겨진다. 2019년 소형차 브랜드 미니의 순수 전기차도 선보이고, 2020년에는 BMW X3의 전기차 버전을 출시한다. 이 차가 iX3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어 2021년에는 i브랜드의 최신 기술을 집약한 i넥스트의 양산에 들어간다.

◇ 한국산 전기차 전용 브랜드는 어디에…현대·기아 또 브랜드 전략 뒤쳐지나?

현대차와 기아차의 전기차 성능은 세계 수준급으로 평가받는다. 판매 대수 규모에서는 상위 10위에도 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1회 충전으로 400㎞를 달리는 전기차의 판매를 이미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주행거리가 중요한 전기차에 있어 상당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주행거리는 단순히 배터리 용량 뿐 아니라 에너지 관리 측면에서 제조사에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요구한다.

다만 아직 현대·기아차가 전기차 전용 브랜드를 만들었다거나, 만들 계획이라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통합 전략’으로서의 브랜드 부재가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경쟁사가 전혀 새로운 브랜드에, 새로운 제품 개발 체계를 갖고 전기차 시장에 뛰어드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주행거리 400㎞를 확보한 전기차의 경우에도 새로운 차가 아니다. 기존 현대차 코나와 기아차 니로를 활용한다. 기성 제품의 전기차 버전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현대차 친환경 브랜드 아이오닉의 제품 라인업. / 현대차 제공
현대차 친환경 브랜드 아이오닉의 제품 라인업. / 현대차 제공
현대차의 경우 아예 전용 브랜드를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친환경 브랜드 ‘아이오닉’을 지난 2015년 선보였다. 아이오닉은 하나의 제품에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전기동력을 모두 적용하는 플랫폼으로 각광을 받았다. 현대차 역시 아이오닉을 중심으로 친환경 전략을 새로 짜겠다고 당시 발표했다.

그러나 아이오닉의 현재는 그리 밝지 않다. 그룹 내 전기차 전략에 있어 신형 전기차(코나, 니로, 쏘울)에 지위가 밀렸고, 새 제품을 내놓겠다는 계획도 현재는 없다. 현대차가 향후 내놓을 전기차에 아이오닉 브랜드를 사용할지는 미지수다.

기아차 니로 역시 브랜드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하나의 제품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브랜드 확장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뜻이다. 2019년초 출시를 예정한 신형 쏘울도 전기차를 추가하는데, 역시 개별 전개로 방향성을 잡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38종의 친환경 제품을 내놓겠다는 방침이다. 전기차 라인업도 14개로 늘린다. 이들이 모두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통일된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게 업계 지적이다. 경쟁상대가 하나의 전용 브랜드에 모든 전기차를 줄세우는 이유를 살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자동차 관계자는 "전기차는 에너지 관리부터 제품 운용, 판매 등 모든 부분에 있어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기존의 제조와 판매만을 떠올려 단순하게 접근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어 "글로벌 대형 자동차 회사가 별도의 브랜드로 전기차에 대한 통합 전략을 구사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라며 "현대·기아차도 향후 전기차 시장의 패권을 다툴 계획이라면 개별 제품 전략이 아닌 통합 브랜드 전략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