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2018년 시작과 함께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인기 만화 ‘루팡3세'를 만든 만화가 ‘몽키펀치(카토 카즈히코·加藤一彦)’가 11일 오후 7시 26분, 8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흡인성폐렴(誤嚥性肺炎)’이다.

만화가 몽키펀치(카토 카즈히코). / 마이니치신문 갈무리
만화가 몽키펀치(카토 카즈히코). / 마이니치신문 갈무리
몽키펀치는 1965년 ‘플레이보이 입문(プレイボーイ入門)’이란 작품으로 만화 업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마니아 그룹(マニア・ぐるうぷ)’이란 필명으로 만화 ‘무타에이지(霧多永二)’ 등의 만화를 그렸다.

만화가 데뷔 전 카토는 일본에서 만화 신(神)으로 평가받는 ‘테츠카 오사무(手塚治虫)’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북해도 앗케시군(厚岸郡) 출신인 카토는 도쿄로 상경 후 DC코믹스가 출간한 패러디 잡지 ‘매드(MAD)’에 심취해 미국 만화 스타일로 그림체를 바꾼다.

만화가 카토에게 ‘몽키펀치'란 필명을 붙인 것은 출판사 후타바샤(双葉社)에서 당시 편집장을 맡았던 시미즈 후미토(清水文人)다. 시미즈는 만화에 따라 여러 개로 불리던 카토의 필명을 1966년 ‘몽키펀치'로 통합한다.

카토는 생전 인터뷰를 통해 "당시 몽키펀치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신인 만화가들에게 적당히 붙인 이름이라 나중에 바꿀 생각이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1967년 만화잡지 ‘주간만화 액션'을 통해 연재가 시작된 ‘루팡3세'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카토는 필명인 몽키펀치를 바꾸지 못하고 평생 가져가게 된다.

몽키펀치가 1967년 루팡3세 만화책 표지. / 핀터레스트 갈무리
몽키펀치가 1967년 루팡3세 만화책 표지. / 핀터레스트 갈무리
1967년 몽키펀치가 선보인 만화 루팡3세는 개그 성향이 강한 지금의 루팡3세와 달리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그림체와 여성 캐릭터의 성(性)적 매력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내용도 결말을 예측하기 어려운 스토리로 만들어져 당시 만화 팬들을 매료시켰다.

몽키펀치는 첫 루팡3세 만화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미국 만화가 ‘모트 드러커(Mort Drucker)’를 지목한 바 있다. 드러커는 미국 사회를 풍자하는 만화가로 유명하며, 그의 그림체는 1967년 당시 몽키펀치가 그린 루팡3세 일러스트와 비슷하다.

몽키펀치가 탄생시킨 ‘루팡3세' 캐릭터는 ‘나쁜남자 스타일의 대도'지만, 루팡3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큰 공을 세운 애니메이션은 원작과 달리 ‘착하고 의리있는 대도'로 캐릭터 성격이 180도 바뀌었다.

몽키펀치는 현지 인터뷰를 통해 "루팡의 마음 속에는 선한 면이 없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나쁜 일을 하는 도둑이지 의적(義賊)은 아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애니메이션 루팡3세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애니메이션 루팡3세 일러스트. / 야후재팬 갈무리
루팡3세의 쫒고 쫒기는 액션은 미국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몽키펀치는 생전 톰과제리의 추격극을 선호했으며, 톰과 제리를 도둑 루팡과 경찰인 제니가타의 추격극의 롤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

몽키펀치는 톰과 제리를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자 ‘윌리엄 한나(William Denby Bill Hanna)’와 ‘조셉 롤랜드 바베라(Joseph Roland Joe Barbera)’와 직접 만나 서로 일러스트를 교환하기도 했다.

몽키펀치는 만화 제작에 컴퓨터와 디지털 태블릿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만화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2003년 66세의 나이로 도쿄공과대학 대학원 미디어학연구과에 입학해 미디어학을 전공했으며, 2년 뒤인 2005년에는 오오테마에(大手前) 대학 인문과학부 미디어 예술학과 만화·애니메이션 코스의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습득한 최신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 디지털만화협회를 설립해 회장직으로 활동했다.

◇ 몽키펀치의 대표작 ‘루팡3세'

몽키펀치가 그린 루팡3세 만화는 연재 시작 2년쯤인 1969년 69편으로 막을 내리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전성기는 1970년대 루팡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진 이후부터다.

루팡3세 애니메이션은 일본 영화 제작사 토호(東宝)가 1969년 만든 ‘파일럿 필름'이 최초다. 첫 TV 애니메이션은 1971년 공개됐다. 하지만, 작품 내용이 어린이가 아닌 성인에 맞춰져 있던 탓에 1970년대 애니메이션 핵심 소비층인 어린이를 사로잡지 못했다.

루팡3세를 세계적인 명작으로 자리매김 시킨 작품은 1977년 공개된 루팡3세 두 번째 시즌이다. 루팡3세 시즌2는 현재 만화·애니메이션 팬들의 머릿속에 채워진 루팡3세 캐릭터 이미지를 확고히 한 작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루팡3세 시즌2가 루팡3세의 인기를 지금까지 유지시킬 수 있었던 토대가 됐다"라고 평가한다.

루팡3세 TV 시리즈는 1984년 ‘루팡3세 파트3’, 2012년 스핀오프(외전) 작품인 ‘루팡 더 서드 미네 후지코라는 여자’, 2015년 루팡3세 시즌4, 2018년 ‘루팡3세 파트5’로 이어진다.

2019년 기준 48년간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유지하고 있는 루팡3세는 일본 최장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사자에상’에 이어 두 번째 최장수 TV애니메이션이 됐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 트위터 갈무리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 트위터 갈무리
루팡3세 애니메이션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극장 영화 작품이다. 특히 1979년 공개된 루팡3세 두 번째 극장판 ‘칼리오스트로의 성(ルパン三世 カリオストロの城)’은 아직도 전 세계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서 ‘명작’으로 손꼽힌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성 라퓨타’, ‘이웃의 토토로’ 등을 만든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이 제작했다.

미야자키 감독의 루팡3세는 1979년 당시 흥행수입 6억1000만엔(61억원)을 기록해 전작대비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지만, 루팡3세 TV 시리즈의 성공과 반복되는 상영회를 통해 인기와 대중 평가를 점점 높여갔다.

루팡3세 데드 오어 얼라이브. / 유튜브 갈무리
루팡3세 데드 오어 얼라이브. / 유튜브 갈무리
1996년작 ‘루팡3세 데드 오어 얼라이브(ルパン三世 DEAD OR ALIVE)’에서는 원작자 몽키펀치가 직접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아 제작을 지휘했다.

이 작품은 원작자가 직접 감독을 맡은 만큼 주인공 루팡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원작 만화에 가깝게 그려졌다.

루팡 더 서드 미네후지코의 거짓말. / 야후재팬 갈무리
루팡 더 서드 미네후지코의 거짓말. / 야후재팬 갈무리
2019년 5월 31일, 일본 현지에서는 루팡3세 9번째 극장 애니메이션 ‘루팡 더 서드 미네후지코의 거짓말(LUPIN THE IIIRD 峰不二子の嘘)’이 상영될 예정이다.

루팡을 만든 만화가 몽키펀치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루팡3세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문화가 살아 숨쉬는 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