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한달만에 반도체 역사를 또다시 썼다. ‘12기가비트 LPDDR5 모바일 D램' 양산에 성공했다. 당장 이달 말 양산에 들어간다. 이름이 길고 복잡하다. 중요한 건 속도다. 쉽게 말하자. 프로세서・낸드메모리 등 부품・회로가 받쳐주면 스마트폰에서 영화 12편을 1초만에 띄운다. 놀라운 기술 진보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주변 부품 등 후속 작업이 뒷받침돼야 한다.

세계 프로세서, 낸드메모리, 특히 완제품과 기술서비스 업체들은 반갑다. 더 우수한 성능의 반도체가 나왔기 때문이다. 더 좋은 성능의 부품, 상용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 기회다. 이것이 글로벌 가치사슬이고 생태계다.

이달 말 양산하겠다고 하니 삼성전자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수출통제 영향이 없을 것인가를 질문했다. 답변은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백방으로 뛴다"였다.

안타깝다. 국내만이 아닌 세계적인 신기술 소식이다. 2차 제품 생산자부터 스마트 기기 이용자까지 모두 반길 일인데 지금은 걱정부터 앞선다.

개발자 심정은 어떨까. 삼성은 2009년 256MB D램 개발 후 쉼없이 달려왔다. 1년이 멀다하고 새로운 D램을 내놓았다. 2013년부터 많게는 한 해 3개의 신제품을 내놓았다. 올해도 벌써 세번째다. 2월 10나노급 16GB LPDDR4X, 6월 12Gb LPDDR5 다음이다. 연내에도, 내년 그리고 내후년에도 추가 개발 일정이 모두 수립됐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개발자들은 ‘우리 삶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 새로운 제품 등장'을 기대하며 연구개발에 여념이 없다. 이렇게 개발한 기술을 소재를 구하지 못해 구현할 수 없다면 이처럼 허탈한 일은 없을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통해 시장조사업체 IHS마켓이 만든 ‘반도체・디스플레이 글로벌 공급망' 개념도를 봤다. 일본(3개사)→한국(3개사)→일본・미국・중국・EU(수십개사) 구조다. 이제 국민 모두가 이해한다. 신에츠화학 등 일본 3개사가 삼성전자 등 3개 반도체・디스플레이업체에 소재를 공급한다. 여기서 만든 반도체・디스플레이를 소니・파나소닉・구글・아마존・화웨이・보다폰・BMW・폭스바겐 등 글로벌 대표기업이 사다 쓴다.

출발점이 일본이다. 거론된 신에츠・모리타・스미토모 모두 솔직히 낯설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비로소 유명해졌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세 회사를 알게 됐다. "우리 없이 무엇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있겠어?"라며 존재감을 확인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일본 정부의 이번 수출 규제 조치는 대성공이다. 실행하겠다는 몸짓만으로도 한국 정부와 업체가 난리가 난 것만 봐도 그렇다.

정작 일본 정부는 큰 것을 놓쳤다. 꼭 봐야 할 곳을 지나쳤다. 이 공급망의 종착점이다. 여러 단계를 거쳐 나온 최종 제품과 서비스가 세계 소비자에게 간다. 이를 통해 세계인의 삶이 바뀐다. 1억2685만 일본 인구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 정부가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업체를 옥죈 결과는 치명적이다. 세계와 인류의 발전과 진보가 멈춘다. 이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일본 소재업체를 탓하는 사람들은 없다. 일본 정부가 그 뒤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이 책임을 어찌 감당하려고 하는가.

아베 정부 주장을 100% 수용, 원인 제공을 한국 정부가 했다고 치자. 그럴지라도 한국 정부의 책임은 한일 외교 갈등 야기에만 국한할 뿐이다. 기술 혁신을 가로막아 세계인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기회를 박탈한 책임은 온전히 일본 정부 몫이다. 사태가 더 커지고 장기화하면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한 세계인의 공분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2020년 56년만의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경제부흥과 글로벌 리더십 확보를 꿈꾸는 일본 정부다. 그 비전이 출발부터 어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일본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