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출연연구소들이 소재별 경쟁력을 파악해 지원을 집중하는 이른바 ‘소재 씨앗 기술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일본 수출규제 장기화에 대비한 조치로 일본과 비교 열위에 있는 소재에 대한 전방위 지원이 뒤따를 전망이다.

이정환 재료연구소(KIMS) 소장은 30일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할 소재 기술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소재 씨앗 기술을 목록화해 단기 전략과 중장기 해법을 구분해 대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료연구소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출연연구소다. 소재 씨앗 기술은 정부 출연연들이 개발에 참여한 차세대 유망 소재 기술들이다. 상당수는 일본 수입 소재 대체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들 소재를 종합해 국가 유망 소재로 육성하도록 중장기 플랜을 수립하는 사업이 ‘소재 씨앗 기술 프로젝트'다.

 이정환 재료연구소장 / 출처 : 재료연구소
이정환 재료연구소장 / 출처 : 재료연구소
이 소장은 1982년부터 재료연구소에서 근무한 재료 소재 분야 전문가다. 재료연구소는 정부 출연 소재 종합 연구기관으로 소재 기술 관련 연구개발(R&D)과 기술 지원 등으로 산업 발전을 돕는다. 박사급 연구원 200여명을 포함, 560여명의 임직원이 근무한다.

지금까지 소재 연구개발은 여러 정부 출연연이 소재별로 과제를 부여받아 진행했다. 기관별 연구 성과를 공유할 컨트롤타워가 없었던 셈이다. 이 소장은 "과기부와 협의해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컨트롤타워인 ‘소재연구기관협의회’를 지난 4월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 협의회는 과기부 산하 10개 기관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2개 기관, 총 12개 정부 출연 기관의 협력체다. 그는 "천만다행으로 한일 무역분쟁이 발생하기 전에 컨트롤타워를 구축한 덕분에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고 말했다.

이 협의회를 통해 각 기관이 개발을 마쳤거나 진행중인 기술을 종합했다. 이 가운데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 가능한 소재 기술과 미래 동력인 첨단 소재 기술을 간추렸다. 이 기술들을 ‘소재 씨앗 기술’이라고 명명했다. 연구소는 소재 씨앗 기술을 ▲주력 기간 소재 ▲정보전자 소재 ▲에너지 환경 소재 ▲재난 안전 소재 4개 분야로 구분하고 분야별 주관 기관을 배치했다. 주력 기간 소재는 재료연구소(KIMS), 정보전자 소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에너지환경 소재는 한국화학연구원(KRICT), 재난안전 소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주관한다.

이 소장은 ‘소재 씨앗 기술’을 분류한 조건을 밝혔다. 수출 규제에 대응하려면 소재 기술 현황 파악이 우선이다. 이를 위해 수입액 100만 달러 이상, 대일 의존도 70% 이상인 소재 기술 90여개를 목록화했다. 이 소장은 "90여개 기술을 추려보니 완성도가 99%인 기술도 있고 60% 정도에 그친 기술도 있다. 한일 무역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대응 가능한 소재 기술도 있지만, 추가 개발이 필요한 기술도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그는 "고순도 니켈합금 기술은 재료연구소가 보유한 완성도 높은 기술이다. 소재 씨앗 기술 내에서 이런 기술이 더 있는지 추가로 살피는 중"이라고 밝혔다.
미래 핵심 소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30여개 관련 분야도 선정했다. 국산화율이 낮은 분야를 중점으로 선정해 투자할 예정이다. 그는 특히 국산화율이 제로에 가까운 한국형 항공기용 독자 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라고 전했다.

이 소장은 "소재 산업은 ‘인내의 산업’으로 10~20년의 중장기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재료연구소는 ‘333 지원’ 제도를 시행한다. 기초와 응용, 실용화로 소재 기술 개발 단계를 구분한다. 기초 단계에서 3년을 투자해 가능성을 보이는 소재는 응용 단계까지 3년을 추가로 지원한다. 이후 응용 단계에서 실용화 가능성을 보이는 소재 기술에 다시 3년을 추가 지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실용화가 끝난 기술이 제대로 정착했는지 1~3년 동안 추가로 살피는 ‘AS 제도’도 시행한다.

중소기업들은 정부 규제가 소재별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이 소장은 "화학물질관리법, 화학물질등록및평가법, 산업안전법 등 관련 법안의 규제가 상대적으로 강한 것은 사실"이라며 "위험 화학물질을 다루는 기업에 강한 규제 사항을 적용하는 것은 맞지만, 이 규정을 모든 소재 기업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며 "소재별 특성에 맞게 규제를 세분화해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이 반도체 생산에 사용하는 주요 부품 소재를 중소기업이 개발한 품목으로 대체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이미 중소기업이 관련 기술을 보유해도 대기업 실무자가 도입을 꺼린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중소기업이 개발한 반도체 주요 소재에 극소량의 불순물이 끼어 있어도 제품 전체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업에 수조원의 손실을 안길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중소기업이 개발한 제품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부분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측정할 도구조차 없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이 개발한 제품이 완벽해도 이를 입증할 방법도 없는 셈이다.

이 소장은 "씨앗 소재 기술 목록화해 어떤 기술이 한일 무역분쟁 장기화에 대응할 기술인지 빠르게 선별하겠다"며 "재료연구소도 부설기관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력 확보, 연구 추진 등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재료연구원’으로 승격을 추진한다. 독립기관으로 거듭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제2의 한일 무역분쟁에 대비하겠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