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미옥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 제1차관이 9일 낮 대덕특구에 있는 SK이노베이션 기술혁신연구원을 찾았다.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R&D) 현장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간담회는 8월 발표한 ‘대외의존형 산업구조 탈피를 위한 소재·부품 경쟁력 강화 대책’과 ‘핵심 원천기술 자립역량 강화를 위한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종합대책’의 연장선에서 마련한 자리다. 정부의 기초·원천 R&D 분야 투자 확대를 발표했다.

과학기술과 R&D 정책을 총괄하는 제1차관이다. 현장 방문은 바람직한 일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좋은 정책이 나온다. 더욱이 소재·부품·장비는 일본의 수출 규제를 계기로 R&D 혁신 요구가 급증한 분야이니 시의적절하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참석했으니 더욱 좋은 그림이다. 간담회에 참석한 산·학·연 전문가들에게 정부의 R&D 지원 의지를 전달하고,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다.

다만 간담회 장소 선정이 아쉽다. 보통 때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은 예민한 장소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이 배터리 기술과 인력 유출을 놓고 한창 전쟁 중이다. 수천억원대 법정 소송과 맞소송으로 첨예한 갈등을 벌인다. SK이노베이션이 8월 말 LG화학 관계사인 LG전자까지 제소하면서 감정싸움까지 번졌다.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이날 간담회는 정부가 한쪽 기업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의 설명은 이렇다. SK이노베이션 기술혁신연구원은 정부 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화학연구소와 협약을 그간 많이 맺었다. 최근 신소재 관련 연구 분야에도 드라이브를 많이 건다. 산·연 협력의 성공적 모델이라는 의미를 살렸다는 설명이다. 과기정통부는 측은 양 사간에 벌이는 배터리 분쟁과 현장 간담회가 별개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단 납득이 된다.

그 다음 설명은 조금 이상하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산업 관련 주무부처인 산업부가 간담회 장소로 SK이노베이션을 선정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과기정통부는 기초 연구 관련 정책을 다루는 부처인 만큼 배터리 분쟁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산연 협력이 이유라면 산업부가 간담회 장소를 SK이노베이션으로 잡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한다. 왜 똑같은 장소를 정하는 데 어느 부처가 하면 문제가 되고 다른 부처가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가. 과기정통부 설명은 한국화학연구소를 간담회 장소로 정했을 때나 납득이 된다. 또 아무리 부처 업무가 다를지라도 어쨌든 같은 정부 아닌가. 산업부와 과기정통부가 지자체처럼 다른 정부라는 말인가.

문미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공
문미옥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공
또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현장 방문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과기정통부는 "초기에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과 협업하면 더 파급력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이며, 결과적으로 정책 고객의 외연을 넓힐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맞는 말이다. 소재·부품·장비와 같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한 분야는 대기업이 R&D를 주도해야 효과적이다.

그런데 일본 수출 규제로 소재·부품·장비 대일 의존도가 한창 문제가 됐을 때 청와대와 정부, 여당 관계자들이 쏟아냈던 발언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국내 중소기업 원재료를 쓰지 않아 발생한 문제라며 대기업을 성토했었다. 정작 정부야말로 대기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닌가.

정부의 산업 R&D 육성 의지를 밝히는 좋은 취지의 현장 간담회다. 장소라는 사소한 것을 갖고 괜한 꼬투리나 트집을 잡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부 행사는 모든 것이 메시지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하느냐가 모두 다 의미있게 전달된다. 문차관이 만일 간담회를 끝내고 인근 LG화학연구소나 인근 중소 기업을 방문했다면 어땠을까. 빠듯하다면 이날 간담회에서 LG화학이나 중소기업이 개발 사례를 발표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날 간담회 취지는 더욱 극대화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R&D를 제대로 혁신해보자는 메시지를 더욱 잘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워서 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