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우리의 삶을 깊숙이 파고든다. 예술 분야도 피해 갈 수 없다. AI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시대다. 저명한 인간 작가보다 AI 화가의 작품이 화제를 모으며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AI ART’ 등장에 우려의 시선을 보낸다. 또 누군가는 인간의 창작 세계를 넓히는 데 AI가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AI 창작으로 예술 분야의 가치와 영향력이 커진다는 주장도 있다. 예술계에 부는 새로운 AI 바람을 [AI ART, 예술의 의미를 묻다] 시리즈로 인사들의 기고를 준비했다. [편집자주]


③두민 작가 ‘AI ART…예술인가? 화가인가?’

예술인가? 화가인가? 필자는 유독 두 가지 질문이 회자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화가다. 현대인은 생활 속에서 인공지능(AI)과 자동화에 익숙해져 AI와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낸다. AI 스피커가 사용자 집을 조종하고 도로에서는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달린다. TV나 영화에서는 스스로 사고하게 된 AI 로봇이 인간 세상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이야기가 소재가 된다.

이런 AI가 최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인간만의 불가침 영역이라 했던 예술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음악, 무용, 소설을 거쳐 미술 영역까지 기술의 힘을 뻗치고 있다. 현재 미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AI 화가는 구글에서 개발한 ‘딥드림'이 있다. 추상미술을 표현한다. 네덜란드 광고회사 윌터톰슨과 마이크로소프트(MS)가 렘브란트 풍의 그림을 그리도록 개발한 ‘넥스트 렘브란트’도 있다. 최근에는 ‘CAN’이라는 AI 화가가 기존의 AI 화가와 달리 미술사조나 이미지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성적 적대 신경망’을 기반으로 인간 화가와 유사한 미술 창작이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2018년 우리나라에도 ‘펄스나인’이라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AI를 기반으로 이미지를 창작하는 AI 아트화가 ‘이메진AI’를 내놨다. 최근에는 세계 최초로 인간 화가와 AI 화가가 협업해 독도를 그린 ‘코뮌 위드(Commune With…)’ 작품을 선보이면서 대중의 평가를 받았다. 실은 필자가 이메진AI와 협업한 인간 화가다.

‘코뮌 위드(Commune With…)’ 작품을 처음 공개하는 간담회에서 첫 번째로 받은 질문은 "왜 AI 화가와 협업하게 됐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호기심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예술가 중에서 특히 미술을 하는 화가에게 호기심은 창작에 동기가 되는 필수 요소다. 자신만의 작업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다. 그 새로움에 도전하다 보면 기성 위치에 존재하는 대상, 이념과 충돌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미술 시장에서 AI 아트의 등장으로 인간 화가와 AI 화가는 충돌 시기를 거쳐야만 하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을 직면하게 된다.

AI 아트를 직접 경험한 인간 화가로서 AI 화가에게 생기는 의문점은 ‘AI 아트 작품이 과연 예술인가?’, ‘AI 아트는 화가일 수 있는가?’다. 미술에 익숙한 모든 이에게는 당연한 의문점이다. 필자는 지극히 인간 화가의 입장에서 AI 아트가 일련의 전시와 작품으로 보여준 결과만으로도 기술적으로 인간 화가 영역에 거의 도달했음을 증명해줬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화가이자 관람자의 입장으로만 보았을 때 무언가 빠진 듯한 허전함이 있다. 필자는 그 허전함이 ‘혼’과 ‘삶’이라는 두 단어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혼’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의 몸 안에서 몸과 정신을 다스리는 비물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작품을 한 인간의 정신을 담아낸 혼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라 이야기한다. 작가가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창작의 고통과 희열이 어쩌면 작가의 혼일 것일진대 이 점에서 AI 화가는 태생적인 불가침의 영역에 설 수밖에 없다.

‘삶’이란 사는 일, 살아있음, 생명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에게 살아있음은 의식과 사고가 함께하며 만들어지는 역사다. 인간 예술가의 모든 창작물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며 인간만이 갖는 오감을 바탕으로 한 삶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AI 아트는 인간에게 정의되는 ‘살아있음’에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고와 미술적, 예술적 결과물을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학습해야만 한다. 그 학습의 결과물만 존재할 뿐 AI 화가만의 스토리, 즉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인간 화가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예술에는 반드시 그 행위를 영위하는 예술가가 존재한다. 미술에서 화가, 조각가가 주체가 되듯 AI 아트도 그 예술을 행위하는 주체로서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AI 아트를 화가라고 말하기엔 조금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예술이란 창작자만이 존재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술을 감상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고 또 그 예술을 소비하는 주체도 있어야 생명력을 얻고 빛을 발할 수 있다. 만약 AI 아트 작품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예술가가 작품 속에 혼과 삶을 담듯 AI 아트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술로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다.

이번에 AI 화가와 협업하면서 느낀 분명한 점은 예술의 새로운 사조로서 긍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AI 아트의 등장은 19세기 사진기가 등장했을 때와 유사하다.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세상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화가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송두리째 흔들어놨다. 곧 화가의 기술이 사진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사라질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하지만 화가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심상에 집중했고 형상을 분해, 결합, 파괴해가면서 새로운 미술사조를 끌어냈다. 현대미술의 밑거름도 다졌다.

AI 아트도 19세기 사진기와 당대 최고의 기술 집약체라는 점이 동일하다. 이 기술을 화가들이 도구로써 창작 활동에 잘 활용한다면 미술의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창작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은 예술가에게 창의적 발상을 하도록 돕는 신선한 자극제가 될 것을 확신한다. 창작 노동도 덜 수 있다.

새로움이란 늘 낯설고 경계심을 준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했듯 그 경계의 선을 용기 내 한 걸음 넘게 되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 AI 아트의 등장을 두려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기꺼이 즐겁게 상생하는 것이 어떨까?

우리는 예술을 접할 때 감탄하며 감동을 한다. 감탄은 어떤 무언가에 놀라는 순간을 표현할 때 쓴다. 감동은 어떤 무언가에 크게 느껴 마음이 움직일 때 쓰는 말이다. 감탄과 감동은 인간의 마음에 울림을 전하며 삶에 연속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마법 같은 단어다. 예술은 감탄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 가치가 있다. AI 아트는 기술 진보로 인간에게 감탄을 준다는 점에서 예술로서 이미 필요충분조건을 갖췄다. 하지만 인간 화가가 추구하는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감동으로 오랫동안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존재케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AI 아트도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로 발전되길 동행자로서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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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민 작가는 추계예술대학교 서양학과 학사를 졸업했다. 개인전뿐 아니라 국내외 그룹전에 150회 이상 참여했다. 다수 해외 아트페어에도 이름을 올렸다. 현 가나아뜰리에 입주 작가이다. 두들아트창미술연구소장이기도 하다. 한양대학교에서 미술고도영재교육 강의와 연구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