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한번에 일상을 마비시킨 KT 아현지사 화재가 발생한지 벌써 1년을 맞았다. 과기정통부는 사고 재발을 막고자 통신재난관리 기본계획을 만들었고, KT는 4800억원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유선 통신장비의 노후화 문제 해결에는 미온적이다. 1985년 국산 기술로 개발한 전전자교환기(TDX)는 더이상 부품 조달이 어렵지만 별다른 대책 없이 여전히 운영 중이다. 최악의 통신재난 사태를 야기한 KT는 TDX 위험성을 알지만 방치한다. 2019년 3분기 누적 설비투자(CAPEX)를 위해 2조952억원을 집행한 KT가 TDX 노후 설비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300억원 투자에 인색하다. 과기정통부는 책임을 회피하며 외면한다. 제2의 통신대란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1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이통업계 등에 따르면, KT는 TDX 노후화로 동케이블 기반 일반전화(PSTN) 유지·보수에 어려움을 겪지만 인터넷전화(VOIP) 등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지지부진하다.

KT 한 고위 관계자는 "TDX 장비 부품 조달이 어려워 자체 보유한 예비 부품만으로 PSTN을 운용 중이다"라며 "남은 PSTN을 VOIP로 모두 전환하려면 수백억원의 비용과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ETRI의 TDX 홍보물. / ETRI 제공
ETRI의 TDX 홍보물. / ETRI 제공
올아이피 전환 비용 최소 300억…수익성 낮은 시내전화 투자 꺼리는 KT

TDX는 신청에서 설치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전화 적체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1982년부터 기술 개발을 추진한 장비다. 전화 수요가 급증한 1980년대에는 전화 한대 가격이 당시 조그만 집 한채에 해당하는 20만원에 달했다. 전화 적체 건수도 60만대에 이르렀다. 5년간 240억원의 연구비를 투입한 끝에 1985년 대용량 전자교환기 TDX-1이 개통됐다. 1987년에는 TDX 대량 보급으로 전화 가입자 1000만명을 돌파했다.

KT의 시내전화 가입자 수는 2018년 기준 1156만명이다. 2000년 2156만명 대비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여전히 1000만명 이상 남았다. 이들을 위해 쓰는 전전자교환기가 국산 TDX 3종이고, 외산은 AXE-10, 5ESS가 있다.

노후화한 TDX의 꾸준한 유지·보수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PSTN을 ‘올아이피(ALL-IP)’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300억원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KT는 비용 때문에 망 업그레이드를 망설인다.

올아이피는 이동통신 서비스인 롱텀에볼루션(LTE), 초고속인터넷 기반의 인터넷전화(VoIP), 인터넷TV(IPTV) 등 유·무선 등 모든(All) 통신망을 하나의 인터넷 프로토콜(IP) 망으로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

시내전화는 투자 대비 수익성이 최악이다. KT에 따르면 시내전화 권역 143곳 중 142곳이 적자다. 매출은 2000년 6조7000억원에서 2018년 9500억원으로 86% 줄었다.

KT 내부에서는 PSTN 교체에 들어갈 투자비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 미래 성장동력이 아닌 만큼 사업계획을 짤 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일각에서는 황창규 회장의 임기가 얼마남지 않았고, CEO 교체 시기인 만큼 최대한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경영진의 안이한 인식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네트워크 담당 직원은 "운용상 개선이 어려워 TDX가 고장나지 않기를 하루하루 요행으로 바란다"고 꼬집었다. 만에 하나 TDX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유력 차기회장 후보인 오성목 네트워크부문장이 난감한 상황에 놓인다. 아현지사 화재에 이어 또다시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

KT 관계자는 "대부분의 재원을 5G 네트워크에 쏟아붓고 있으며, TDX 등 기존 네트워크 장비 유지·보수에 들어갈 투자비 확보는 어렵다"며 "3년간 4800억원을 투입하는 재난대응 투자계획을 발표했지만 장비 노후화 문제를 개선하는 방안은 별개로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세종시에 위치한 과기정통부 안내 표지판 모습. / 이진 기자
세종시에 위치한 과기정통부 안내 표지판 모습. / 이진 기자
과기정통부 "민간기업 투자 강요 못해"

과기정통부는 9월 망 이원화 기간을 단축하는 내용을 ‘2020년 통신재난관리 기본계획(안)’에 포함하며 재난 방지에 골몰한다. 하지만 설비 노후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미온적이다.

과기정통부 고위 관계자는 "TDX 등 KT 유선 통신장비 노후화 문제를 알고 있지만 정부가 민간 사업자에 장비 하나하나 개선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며 "기업이 스스로 운용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스스로 투자를 해야하는 사안이지 강제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TDX 건이 최근 SK텔레콤이 장비 노후화를 이유로 종료를 신청한 2G 서비스와는 다른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2G 종료의 경우 과기정통부가 주파수를 할당한 후 이통사의 활용 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대책을 논의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TDX 문제는 오로지 기업의 투자 여부에 달렸다는 것이다.

KT 광화문 사옥 전경. / KT 제공
KT 광화문 사옥 전경. / KT 제공
시내전화 요금 인상 카드 꺼낸 KT의 속사정

KT가 올아이피로 전환을 위한 투자를 고심하는 이유는 결국 ‘돈’이다. 노후화 설비에 들어갈 투자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통신재난 방지 등 안정성 확보뿐 아니라 수익성 개선 방안도 필요하다. KT 내부에서 20년간 동결한 시내전화 요금 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KT는 10월 초 관련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과기정통부를 만났다. TDX 노후화에 따라 PSTN을 VOIP로 전환하는 데만 300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를 만회하려면 시내전화 요금 체계를 고쳐야한다는 의견을 낸 것이다. 사실상 요금을 인상하겠다는 의중이다. 시내전화 요금제 변경은 정부 인가 대상이다.

과기정통부는 KT에 시내전화 요금 체계 변경안을 내면 협의해보자는 답변을 내놨다. 이에 KT도 인상 사유와 이용자 보호 정책 등을 담은 자료를 준비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통업계는 KT의 시내전화 요금 체계 변경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국민의 통신기본권 보장을 위해 보편 서비스로 지정해 운영한 시내전화 요금을 20년만에 올리는 것에 소비자나 시민단체의 부정적 시선이 나올 수밖에 없어서다. KT로선 TDX 노후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내전화 요금 인상부터 확정지어야 하는데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KT는 과거 CEO 메시지를 통해 올아이피로 전환을 약속했는데 이를 현재까지 지키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와서 장비 노후화를 얘기하며 시내전화 요금 인상을 언급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핑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