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의 식물 탐사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일단 배편에 맞춰 시간을 면밀히 계산해서 일정을 짜야 후회할 일이 덜 생깁니다. 가져가야 할 것과 가져가지 말아야 할 것을 결정하는 것도 일이라면 일입니다. 불필요한 짐은 그대로 짐이 될 수 있으므로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최종 선발된 것만을 가방에 담습니다.
1박 이상 해야 한다면 양상은 또 달라집니다. 짐의 양이 훨씬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배가 뜨지 못하는 날에는 갇힐 수도 있으므로 돌아오는 날의 날씨 상황까지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초행길이라면 선착장 위치 같은 것도 확실히 알아놓아야 합니다. 저처럼 바뀐 줄도 모르고 엉뚱한 데 갔다가 다시 찾아가느라 승선 시간에 쫓겨 승용차로 날아가야 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구간단속에 붙들려 마음만 날아 60㎞/h로 기어갔지만 말입니다.

전남 신안군 암태남강여객선터미널의 아침
전남 신안군 암태남강여객선터미널의 아침
1004의 섬으로 불리는 전남 신안군은 울릉도 못지않은 보물섬입니다. 바둑 고수가 바둑판 귀퉁이에 깔아놓은 포석처럼 한반도 지도 한 귀퉁이에 점점이 놓인 그 섬들을 전에는 쉽게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섬들을 잇는 다리가 놓이면서 줄줄이 연결되어 차바퀴가 닿는 곳이 많아졌습니다. 또 관광객과 물류 이동의 증가로 배편도 많아지면서 섬은 좀 더 가깝게 가리킬 수 있는 곳이 됐습니다.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의 고향이라는 전남 신안군 비금도도 그런 곳 중 하나입니다.
외딴 섬이라고 해서 그동안 식물상 조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접근성이 좋지 않아 육지에 비해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어쨌든 그 조사자들의 눈과 발이 섬 구석구석을 다 훑고 지나갔을 리 없습니다. 또 같은 장소라 하더라도 식물상은 계절마다 달라지기에 그분들이 찾아내지 못한 식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곳에 뭐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희 같은 사람에게 있어 미처 가보지 못한 섬은 아주 좋은 보물섬 후보입니다.

전남 신안군 그림산에서 본 다도해 모습
전남 신안군 그림산에서 본 다도해 모습
그렇다고 모든 외딴 섬이 다 보물섬인 건 아닙니다. 높은 산이 한두 개쯤 솟아 있어야 보물 창고 같은 노릇을 합니다. 그런 조건에 맞는 섬 지역을 골라 뒤져야 보물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찾지 못한 걸 내가 찾아낸다면 하는 상상은 공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걸 알면서 이번에도 그런 상상이 새벽 3시에 일어나 4시간에 가까운 장거리 운전을 하게 합니다. 12시부터 잤으니 세 시간 자고 일어나 출발한 셈입니다. 전에는 그보다 더한 짓도 많이 했기에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차를 배에 태우는 번거로운 일을 끝내고 나면 졸음이 눈꺼풀을 내립니다. 그렇다고 잠들면 안 됩니다. 45분만 가면 새가 날개를 펼친 형상이라는 뜻의 비금도가 가산항의 품으로 객을 맞아주니까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답게 비금도는 어딜 봐도 그림 같은 풍경입니다. 그중에서도 진짜 그림 같은 산이 있다고 해서 그리로 가서 등산화로 바꿔 신습니다. 이름하여 그림산입니다. 그림같이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디서 지린내가 풍겨옵니다. 누가 싼 건가, 하고 의심하다가 이내 그 냄새의 주범이 사스레피나무임을 알아차립니다.

사스레피나무의 꽃
사스레피나무의 꽃
사스레피나무의 붉은빛이 도는 꽃
사스레피나무의 붉은빛이 도는 꽃
사스레피나무가 싼 건 아니고, 이맘때 피는 그 나무의 꽃에서 특유의 향기가 나는 건데, 그게 소변 냄새와 비슷합니다. 수목원의 온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는 한 개체만 피어도 지린내가 코를 강타합니다. 하지만 드넓은 바닷가 섬 지역에서는 그저 약간 자극적인 냄새로 인식됩니다. 남녘에서는 비교적 흔한 나무라 해마다 봄이면 남부 지역의 섬은 온통 사스레피나무 향기에 휩싸이곤 합니다. 주변에 핀 생강나무가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알싸한 향기로 대적해 봅니다만, 사스레피나무의 지린내를 이길 순 없습니다. 생강나무나 사스레피나무는 이른 봄에 꽃 피는 나무답게 둘 다 특유의 향기를 풍기고 암수딴그루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림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보니 암벽에 붙어 자라는 바위손이 많습니다. 바위손은 부처손이나 개부처손과 유사한 양치식물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혼란이 좀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바위손과 부처손을 반대로 설명해 놓은 것을 보고 좀 놀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알아 온 것이 잘못된 건가 싶어서 여러 자료를 다시 뒤져봤습니다. 그런데 바위손, 부처손, 개부처손은 이름만 놓고 보더라도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건기에 잔뜩 오므리고 있다가 건기가 지나면 깔때기 모양으로 둥글게 모여나기를 하는 바위손은 너무나도 특징적인 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부처손과 개부처손은 둘 다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겼으므로 이름도 비슷하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처손과 개부처손은 아주 미세한 차이점으로 구별합니다. 그래서 생김새보다는 분포 지역으로 구분하는 편이 빠릅니다. 제주도 하천 주변의 바위에서 자라는 건 부처손, 강원도나 충북의 석회암 지대에서 자라는 건 개부처손,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위손은 둥글게 모여나기를 한다
바위손은 둥글게 모여나기를 한다

부처손은 제주도 하천 주변의 바위에서 많이 자란다
부처손은 제주도 하천 주변의 바위에서 많이 자란다
개부처손은 강원도나 충북의 석회암 지대에서 많이 자란다
개부처손은 강원도나 충북의 석회암 지대에서 많이 자란다
해당 사이트에 오류 제보를 해서 칭찬을 받으려다가 참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니까요. 그러던 중 얼마 전에 그 오류가 수정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행이다 하면서 살펴보니 아직은 덜 다행이었습니다. 바위손과 부처손의 이름만 바꿔놓았을 뿐 설명 내용이나 분포 표시는 수정해 놓지 않아 혼란을 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급경사가 많은 그림산의 등산로
급경사가 많은 그림산의 등산로
이번 섬 지역 산행에서는 무서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싶을 정도로 오금 저리는 좁고 급한 경사지를 거센 바람 속에서 네발로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본 것이 감태나무, 노간주나무, 마삭줄, 멀꿀, 모람, 발풀고사리, 보리장나무, 보춘화, 산자고, 상동나무, 새끼노루귀, 석위, 송악, 실거리나무, 이대, 진달래, 콩짜개덩굴, 화살나무 등입니다. 특히 산등성이까지 퍼져 자라는 발풀고사리 군락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엄청난 군락이어서 동영상까지 찍어두었습니다. 비교적 흔한 식물이지만 제 기준에서는 그것도 보물이라면 보물입니다.

산자고
산자고
그 외에 특별한 보물 같은 건 없었노라고 거짓말을 할까 합니다. 그럴 땐 제가 애꾸눈 실버 선장이 아니라 보물을 먼저 발견해 숨긴 선원 ‘벤’ 같은 느낌입니다. 식물이라는 보물의 가치 판단은 보물인지 알아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보물인 줄 모르고 지나친다면 그건 보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걸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더라도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면 보물일 수 없습니다. 제 눈에 보물이 유독 많이 보이는 건 보물처럼 여기는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안군에는 아직도 가보지 못한 섬이 많습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육상에 있으므로 건져 올리지 않아도 되니 가상화폐는 발행하지 않으렵니다. 실버 선장이나 소년 ‘짐’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숨은 보물 발굴에나 힘써볼까 합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현장전문가로 일한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 글에 쓴 사진도 그가 직접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