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산에 꼭 연인이랑 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산을 연인 삼아 등산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을 연인 삼으며 오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름도 특이한 경기도 가평군의 연인산(戀人山)은 가시덤불에 덮인 이름 없는 산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99년 봄에 공모를 통해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뜻에서 연인산이라는 지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산을 찾는 모든 사람이 길수와 소정의 이야기처럼 사랑과 우정을 나누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하는데, 길수와 소정의 이야기가 너무 현대적이고 지어낸 티가 팍팍 나서 소개하기가 좀 민망합니다.

경기도 가평군 연인산의 5월 풍경
경기도 가평군 연인산의 5월 풍경
어쨌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화전민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전쟁 이후 연인산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화전민은 1972년에 산림 녹화사업이 시행되면서 모두 이주하였습니다. 그 당시 화전민이 일구었던 농경지에는 잣나무와 일본잎갈나무가 심어졌습니다. 그 덕에 연인산에는 국내 최대의 잣나무 조림지가 생겨났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잣이 전국 잣 생산량의 1/3 정도나 된다고 합니다. 2005년에 경기도에서 두 번째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연인산은 일반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연인산의 잣나무 식재지
연인산의 잣나무 식재지
높이는 1,068m입니다. 1,000m를 겨우 넘는 산치고는 상당히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자랍니다. 아마도 화전민 외에 다른 사람의 출입이 드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로만 듣던 연인산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왜미나리아재비 군락지가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습니다. 4월 중순 무렵에 피는 왜미나리아재비는 군락지가 대부분 강원도의 국유림에 있습니다. 5월 15일 산불 조심 기간이 끝난 뒤에야 들어가 볼 수 있는 지역이다 보니 제대로 된 꽃 무더기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경기도 연인산에 군락지가 있다는 겁니다. 강원도가 아닌 경기도에 왜미나리아재비가 군락을 이룬다는 건 특이한 일입니다. 물론 연인산보다 더 남쪽인 유명산에도 왜미나리아재비 군락지가 있다지만, 그곳보다 연인산이 훨씬 더 찾기 쉬운 곳에 있는 것 같아 회가 동했습니다.

왜미나리아재비는 광택이 나는 노란색 꽃을 4월 중순 경부터 피운다
왜미나리아재비는 광택이 나는 노란색 꽃을 4월 중순 경부터 피운다
처음으로 찾아가 본 연인산은 예상대로 몹시 추웠습니다. 춥지 않다면 왜미나리아재비가 자생하지 못할 것이므로 분명히 추운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추웠습니다. 솔직히 말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추웠습니다. 4월 말로 접어드는 시기인데도 그곳은 벚꽃이 싱싱하게 피었을 정도로 추웠습니다. 내륙인 탓도 있겠지만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냉기를 계속 공급해서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연인산은 추운 지역이라 4월 늦게까지도 벚꽃이 피어난다
연인산은 추운 지역이라 4월 늦게까지도 벚꽃이 피어난다
암만 그렇대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북사면이 아니라 남사면으로 보이는 곳에 어떻게 왜미나리아재비 군락이 형성됐느냐는 것입니다. 왜미나리아재비가 군락을 이루려면 춥기도 해야 하지만 대개 계곡을 끼고 있는 북사면이어야 합니다. 계곡을 끼고 있기는 하나 방향이 남사면이라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혹시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심은 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 의문은 현장에 도착하자 바로 풀렸습니다. 계속 오르막이었던 것이 아니라 고개에서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지면서 사면의 방향이 자연스레 북사면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산은 그렇게 입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또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드디어 만난 왜미나리아재비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광택이 나는 노란색 꽃이 모두 왜미나리아재비였습니다. 배낭을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모르겠을 정도로 발 디딜 틈 없이 왜미나리아재비가 여러 식물과 뒤섞여 자라는 모습이었습니다. 경기도에서 이렇게 보존이 잘 된 숲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좋은 놀이터를 발견한 개구쟁이처럼 기분이 좋아 추위 속에서 연신 코를 훔치며 감탄했습니다. 왜미나리아재비야말로 연인산의 오랜 연인이구나 싶었습니다.

연인산의 왜미나리아재비 군락
연인산의 왜미나리아재비 군락
그 외의 식물로는 천마괭이눈, 누른괭이눈, 연노랑괭이눈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계곡 주변에는 산괭이눈이나 애기괭이눈이 함께 자라고 있었으니 연인산에는 최소한 5종의 괭이눈속 식물이 자라는 셈입니다.

연인산에 많은 연노랑괭이눈
연인산에 많은 연노랑괭이눈
시선을 숲 쪽으로 돌리면 멸종위기Ⅱ급왕제비꽃과 마주치기도 합니다. 연인산 어느 지점에 왕제비꽃 군락이 있다고 하던데, 거기서 몇 포기가 내려와 자라는 모양입니다. 졸방제비꽃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왕제비꽃은 잎밑이 심장형이 아니라 쐐기형인 점이 다르고 키가 좀 더 큰 편입니다. 생김새는 달라도 둘 다 연인산의 오랜 연인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왕제비꽃은 국내 제비꽃 종류 중에서 가장 키가 크다
왕제비꽃은 국내 제비꽃 종류 중에서 가장 키가 크다
추운 곳이다 보니 연인산의 금낭화는 5월까지도 계속 피고 집니다. 금낭화가 산중에서 피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금낭화가 우리나라 자생식물이 아니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실 금낭화는 설악산에서도 자라고 그 외의 지역에서도 무리 지어 자랍니다. 그렇게 잘 퍼져 자라기는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자생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금낭화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자라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연인산의 오랜 연인으로 쳐주기는 어렵습니다.

금낭화는 산중에서도 피므로 원래부터 자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금낭화는 산중에서도 피므로 원래부터 자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등산로 초입에는 몸에 납작한 가시를 단 주엽나무가 자랍니다. 심은 것이겠거니 할 수 있지만, 연인산 등산로 주변에서 자라는 아주 커다란 주엽나무 몇 그루를 보면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곳에 원래부터 자라던 주엽나무가 주책맞게 마을 여기저기로 씨를 뿌려대는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연인산 등산로 주변에는 커다란 주엽나무가 몇 그루 자란다
연인산 등산로 주변에는 커다란 주엽나무가 몇 그루 자란다
그 주변에는 두충꾸지닥나무도 함께 자랍니다. 둘 다 연인산의 오랜 연인으로 쳐주기는 어렵습니다. 두충이야 약이나 차로 쓰려고 들여왔겠지만 꾸지닥나무는 종이를 만들기 위한 건데 어쩌다 가평군 연인산에서 자라게 됐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닥나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꾸지닥나무로, 암그루만 들여와 심었기에 국내에서는 암그루만 보인다고 합니다.

흔히 닥나무로 불리는 꾸지닥나무가 연인산 등산로 초입에 몇 그루 심어져 있다
흔히 닥나무로 불리는 꾸지닥나무가 연인산 등산로 초입에 몇 그루 심어져 있다
한 가지 우려스러운 건 단풍잎돼지풀의 혼생입니다. 대개 들녘에 많이 퍼져 자라는 생태계교란식물인데, 연인산 등산로 주변에 대만 남은 작년 개체의 흔적이 몇 개 보였고 그 아래에 새로 발아한 어린 개체들도 보였습니다. 숲을 잠식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늘까지 침범해 자라는 모습에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부디 연인산의 연인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풍잎돼지풀의 어린싹
단풍잎돼지풀의 어린싹
연인산에 꼭 연인이랑 가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혼자 간대도 나물 뜯는 아주머니와 나물 정보를 공유하는 인연을 맺을 수 있으니까요. 혹시 다래 순보다 고추나무 순이 더 맛있더라는 분을 만나면 답례로 고급 정보 하나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여긴 도립공원이므로 함부로 야생식물을 채취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고요. 농담인 줄 알아듣는다면 아마 금세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생식물채취금지 안내판
야생식물채취금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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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현장전문가로 일한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 글에 쓴 사진도 그가 직접 찍었다. freebowl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