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94) 레디메이드 인생 ②… 어쭙잖은 객기의 결과는

조연미 콘텐츠팀장
입력 2020.06.16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에는 일제 강점기 한국소설가·극작가·문학평론가·수필가 채만식(蔡萬植, 1902~1950)의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을 골랐습니다. 전북 임피군에서 출생하여 서울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채만식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했고, 곧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계기가 된 작품 《레디메이드 인생》을 필사하면서 채만식의 ‘풍자’를 찾아보세요. /편집자 주

채만식의 작품활동이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것은 1932년을 전후부터이다. 이 무렵 그는 계급문학의 현실지향적인 경향에 동조하는 동반자적인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적 지위가 확고해진다. 이 시기에 발표한 《레디메이드 인생》은 직업과 그 존재 이유로부터 소외된 지식인의 사회적 초상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위 왼쪽은 중앙고보 재학 당시 채만식(뒷줄 왼쪽), 오른쪽은 1923년 와세다 대학 시절의 채만식.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레디메이드 인생 ② (글자수 841, 공백 제외 630)

광화문 큰 거리를 총독부 쪽으로 어실어실 걸어가노라니 그의 그림자가 짤막하게 앞에 누워간다. P는 그 자기의 그림자를 콱 밟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내어디디면 그림자도 그만큼 앞으로 더 나가곤 한다. 이 그림자와 자기 자신에서 그리고 그림자를 밟으려는 자기 자신과 앞으로 달아나는 그림자에서 P는 자기의 이중인격의 모순상을 발견하였다. 동십자각 옆에까지 온 P는 그 건너편 담뱃가게 앞으로 갔다.

"담배 한 갑 주시오." 하고 돈을 꺼내려니까 담뱃가게 주인이, "네, '마꼬'입니까?" 묻는다.

P는 담뱃가게 주인을 한번 거들떠보고 다시 자기의 행색을 내려훑어보다가 심술이 번쩍 났다. 그래서 잔돈으로 꺼내려던 것을 일부러 일 원짜리로 꺼내드는데 담뱃가게 주인은 벌써 마꼬 한 갑 위에다 성냥을 받쳐 내어민다.

"'해태' 주어요." P는 돈을 들이밀면서 볼멘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담뱃가게 주인은 그저 무신경하게, "네!" 하고는 마꼬를 해태로 바꾸어 주고 팔십오 전을 거슬러다 준다. P는 저편이 무렴해 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욱 얄미웠다. 그는 해태 한 개를 꺼내어 붙여 물고 다시 전차 길을 건너 개천가로 해서 올라갔다. 인제는 포켓 속에 남은 것이 꼭 삼 원 하고 동전 몇 푼이다. 엊그제 겨울 외투를 사 원에 잡혀서 생긴 것이다.

방세와 전기불 값이 두 달치나 밀렸다. 삼 원은 방세 한 달치를 주고 일 원에서 전등 삯 한 달치를 주고 싶었으나 그리고 나면 나머지로 설렁탕이나 호떡을 사먹어도 하루밖에는 못 지낸다. 그래 그대로 넣어두고 한 이틀 지내는 동안에 일 원이 거진 달아났던 판인데 공연한 객기를 부리느라고 당치도 아니한 해태를 샀기 때문에 인제는 일 원 돈은 완전히 달아나고 삼 원만 남은 것이다.

* 단어 풀이
- 마꼬와 해태 : 조선총독부는 1921년부터 담배 전매제를 실시했는데, 본문 중에 등장하는 '마꼬'(マコー)는 근대문학에서 싸구려 담배의 대명사로 자주 등장한다. 한편, '해태'(カイダ)는 마꼬와는 달리 고급 담배로 '피죤'과 함께 거론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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