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콘텐츠 ‘사전심의’ 제도는 이미 한계점을 넘어선지 오래다. 전 세계에서 쏟아져 밀려들어오는 콘텐츠를 국가 기관이 일일이 심사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콘텐츠 업계에 따르면 북미를 포함한 아태지역에서 영상물 사전심의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는 대한민국뿐이다. 한국 외 영상물 사전심의제도를 운영하는 지역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소수 국가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영상 사업자가 해당 국가 가이드에 맞춰 자율적으로 콘텐츠 등급을 분류하고 영상물을 서비스한다.

한국에서 영화·드라마 등 등급분류를 담당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만 봐도 사전심의 제도의 한계점은 여실이 드러난다.

넷플릭스가 영등위에게 심의를 맡기는 영상물 수는 월간 150~300개다. 연간으로 따지면 1800~3600개에 달한다.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영등위가 등급분류한 영상물은 영화 2722개, 비디오물 7781개다. 숫자로만 봐도 넷플릭스 1개 업체가 영등위 업무의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들이 독점 콘텐츠 수를 늘리는 등 몸집 키우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1년에는 넷플릭스 대항마로 평가받는 ‘디즈니 플러스'도 한국에 상륙할 전망이다. 정부도 한국 땅에서 2022년까지 글로벌 OTT 플랫폼 기업 최소 5개를 키워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영등위는 OTT 서비스 영상물 조차 제대로 처리하기 어렵다. 사전심의 제도를 고집하면 할 수록 피해를 받는 것은 결국 콘텐츠 시청자다. 업체 입장에서도 계획적으로 콘텐츠를 시청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어려워 진다.

심의 비용도 문제다. 영등위에 따르면 영상물 심의 비용은 10분당 1만원이다. 보통 60분쯤인 어린이용 극장 애니메이션 심의에는 6만원이 든다. 해외 영상 콘텐츠의 경우 영등위 심의비는 더 비싸진다. 10분당 1만7000원이며, 60분 분량 콘텐츠의 경우 10만2000원이 필요하다.

비용 문제는 OTT 업체들처럼 한 번에 심의 받아야 할 영상 콘텐츠가 많을 때 더 심각해진다. 심의 받는 콘텐츠를 30분 분량의 해외 드라마이고, 영등위에 300건을 의뢰했다면 1530만원의 심의 비용을 영등위에 지불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콘텐츠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가 각종 규제와 문제를 교통정리하지 않으면 결국 영상 콘텐츠 산업은 도태된다. 창작자와 산업이 열심히 노력해 한발 두발 나아간다해도 정부가 발목을 잡아 헛 걸음만 계속할 뿐이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급변하는 콘텐츠 시장 속에서 제 자리 걸음은 엄밀히 말해 뒤쳐지는 것과 다름없다.

게임업계에서도 사전심의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업계는 게임물관리위원회와 게임콘텐츠등급분류위원회를 파트너가 아닌 ‘갑'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도 이들 심의 기관에 대한 시선이 곱지않다.

게임 사전심의 제도 역시 물리적인 한계가 있다. 글로벌 PC게임 플랫폼 ‘스팀(Steam)’에 한 해 등록되는 신작 게임 수는 2019년을 기준으로 8396개에 달한다. 그에 비해 게임물관리위원회가 2019년 등급분류 처리한 게임 수는 1958건에 불과하다.

스팀 플랫폼은 PC게임 플랫폼 중 하나에 불과하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 게임 시장에서 PC게임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8년 기준 35.1%에 불과하다. 모바일 게임이 가장 많은 46.6%를 차지한다.

모바일 게임으로 눈을 돌리면 사전심의 제도는 운용 자체가 넌센스란 말이 절로 나온다. 구글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나게 많은 게임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구글에 문의해도 정확한 게임 출시 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만 돌아온다.

이쯤되면 왜 그들은 세상이 변했는데도 사전심의 제도를 고집하고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주도로 사전심의 제도 폐지가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6월,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 발전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디지털 미디어 강국’을 비전으로 2022년까지 국내 시장규모 10조원, 수출액 16조2000억원, 글로벌 OTT 플랫폼 기업 최소 5개를 키워내겠다는 목표다. 발전방안에는 ‘자율등급제’ 등 디지털 미디어 생태계 육성을 위해 각종 규제를 폐지·완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콘텐츠 업계는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정부는 방안은 발표했지만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실현에는 관련 법 통과 등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정부는 ‘수출 주역’이라 치켜 세운 게임 산업과 웹툰 등 K스토리로 세계시장으로 발돋움하는 영상 콘텐츠 업계의 발목을 잡는 규제와 사전심의 제도 폐지에 적극 나서야 한다. 과거 만화와 게임을 마녀사냥 하듯 잡아 자라나는 콘텐츠 산업을 짓밟은 과오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된다.

급변하는 세계 콘텐츠 시장은 한국을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김형원 기자 otakukim@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