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노래 ‘가시나무’의 한 소절이다. 자기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이나 복잡한 마음을 나타낼 때 종종 인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나 마음을 하나로 부여잡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극복의 노력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하고 정리하려 걱정할 필요가 없는 시대다. 있는 그대로 자신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을 인정하고 보여주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부캐(부캐릭터의 줄임말) 전성시대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마음 상태, 주변 환경이나 여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제는 그런 다양한 자신의 캐릭터들을 밀어내지 않고 부캐로 인정하고 마음껏 발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2020년 핵심 소비자 트렌드로 인간의 다원성에 주목한 '멀티 페르소나'가 하나의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부캐의 전성시대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게임에서 사용하던 용어였던 부캐는 어느덧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이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것이 한 방송국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와 그 중심에 있는 가수 이효리의 부캐 ‘린다 G’가 아닐까 한다.

남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남들이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걸 린다 G는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사이다 같은 병맛을 느끼고 유쾌 상쾌 통쾌함으로 대리 만족한다. 린다 G는 이효리이자 이효리가 아니다.

조직을 떠나면서 쾌재를 부른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직의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내 뜻대로, 내 성격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부푼 기대감.

막상 프리에이전트(Free Agent) 생활을 시작하자 완전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프리는 갑을 관계에만 있어도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프리에이전트의 프리는 ‘자유로운’ 프리가 아니라 ‘내가 없는’ 그러니까 자아를 집 안 서랍에 놓고 나와야 하는 프리였다.

하청의 하청에 해당하는 일이라도 할라치면 갑을병정 관계에서 정쯤 되는 위치에 놓인다. 그 위치가 되면 내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라는 대로 일을 하고, 해 달라는 대로 해야 일이 순탄하게 돌아간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나 생각하지만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면 입에 개 거품을 물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그래도 일을 놓치지 않으려면 인내와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하고, 그러지 못할 바에는 지레짐작이라도 싹수가 안 보일 것 같은 일은 처음부터 맡지 말아야 한다.

프리 생활을 하는 내내 이런 내적 갈등은 매 순간 찾아왔다.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하거나 담당자를 만나면 금방 나의 한계가 드러날 것 같아 미리 겁을 먹고 일을 밀어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는가. 쪽박을 차고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곤했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하다간 천국 같은 프리의 세계를 맞이하기는 커녕 당장 길거리에 나 앉을 판이라 한동안 고민을 했다. 일을 할 때 가장 온화하고 인내와 이해력을 잘 발휘할 내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챘다.

갑을 관계이거나 갑을병정 관계라도 그 속에서 내 마음을 챙기면서 일도 친절하게 할 수 있는 내 안의 나를 극적으로 끄집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친절한 마녀’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마케팅하는 녀자’라는 의미로 만든 필명이었다. 이제는 나의 활동명이자 부캐가 됐다. '까칠할 것 같은 마녀가 친절하다니'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은 굳이 뜻을 설명하지 않고 해석하는 이에게 온전히 그 의미를 맡긴다. 그 덕에 나는 사람들에게 까칠한 면을 보여줘도 친절한 면을 보여주어도 편안해질 수 있다. 일의 관계나 사람들 반응도 덜 민감하게 됐다.

내가 편안해지니 일 하는 모든 관계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름 따라간다고 했던가. 더 친절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연습하게 되고 더 많은 일에 접근할 여유와 용기도 생겼다.

조직에서 일할 때는 조직 내 관계와 자신의 일만 신경을 쓰면 되지만, 프리로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밥벌이를 스스로 만들고 책임져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언제 어느 때 어떤 일을 누구와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자신의 성격을 죽이면서 일을 해도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하고 자존심에 상처 나는 일도 수두룩 하다. 그게 싫어 일과 사람을 가려서 하고, 마음에 안 맞는 일은 걷어 차고, 성격대로 하지 못해 성을 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과 성과가 일정 수준 이상의 인정과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면 더욱 냉혹한 현실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자아를 잃어가면서까지 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러니까. 그럴 때 비즈니스용 부캐를 끄집어 내보자. 없다면 만들어 보는 것도 유용하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해야 하는 캐릭터는 일을 끌어 가는 데 유리한 내 안의 나를 부각하거나 바라는 모습으로 만들면 된다. 굳이 내 본 캐릭터로 일을 해 상처 받을 필요가 없으며 자존심 상할 필요가 없다. 부캐도 상처 받으면 아플 테지만 내 본질적인 자아만큼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조직에서도 그렇겠지만 프리의 세계에서 일을 할 때 부캐는 본캐(본 캐릭터의 줄임말)를 지키고 관계를 유연하게 하며 일을 지혜롭게 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더 좋은 대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쯤 되면 노랫말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있네"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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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전쟁터를 걸어 나와 지옥의 문을 연 4년차 프리에이전트다. PR마케팅 대행, 강의, 콘텐츠 개발, 번역 분야에서 친절한 마녀로 활동하고 있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 원하는 조건, 원하는 사람을 위해 일하며 프리한 삶이 지속가능한지 실험 중이다. 천국 같은 프리의 세계가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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