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브레이크 없는 소송전을 벌인다. 양사는 10월 26일(현지시각)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 최종 판결을 앞뒀다. 하지만 합의가 진전되기 보다는 분쟁을 지속할 분위기다.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치킨게임’ 양상이며, 소송비로 수조원을 쓸 판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공방을 펼치는 사이 유럽을 공략 중인 CATL과 또 다른 업체 노스볼트가 반사이익을 얻는다. 기존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등 K배터리가 장악했던 시장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소송에서 한쪽이 쓰러지지 않고 항소와 맞소송을 거듭할 경우 문제가 커진다. 소송 장기화는 양사의 재무건전성을 지속 압박하고 경영 불확실성을 높인다. 기약없이 소송 비용만 지출하면서 정작 써야할 곳에 자금을 투입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연구개발(R&D)에 1원이라도 더 보태 미국, 중국, 유럽 등 경쟁국 대비 한발짝 더 달아나야 하는데 ‘세기의 소송’이라는 큰 짐을 떠안은 것이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왼쪽)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각사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왼쪽)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 각사
7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2019년 4월부터 지출한 소송 비용은 10월까지 4500억원 수준에 육박한다. 상대적으로 복수의 로펌을 활용하는 LG화학이 더 많은 소송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LG화학은 글로벌 로펌 피쉬앤드리차드슨, 덴튼스, 레이섬앤드왓킨스 등 글로벌 대형 로펌 세 곳을 법률대리인으로 뒀다. SK이노베이션의 파트너는 코빙턴앤드벌링 한 곳이다.

양사 의견을 종합해보면, 26일 ITC의 최종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돌입한다. 영업비밀 침해 건을 놓고 한쪽이 연방법원에 곧바로 항소하는 것은 물론 별도 진행 중인 특허 침해 소송 2건과 손해배상 소송 3건까지 물고 물리는 법적 분쟁이 예고된 상황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양사가 합의에 이를 생각이 없다면 영업비밀침해 소송만으로 3~4년의 지리한 공방을 이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며 "다른 소송까지 확전을 이어간다면 지금까지 지출한 것보다 훨씬 많은 수조원에 달하는 비용을 써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양사의 분쟁이 3년 이상 장기화 될 경우 총 소송 비용은 앞서 증권가를 통해 언급된 합의금인 2조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LG화학은 2020년 2분기 전지사업 부문에서 영업이익 1555억원을 기록하며 처음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오랜기간 적자에서 허덕이다 이제야 흑자로 돌입한 전지사업에서 분기 영업이익의 7배가 넘는 자금이 미 로펌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일 수 있는 셈이다. 배터리 부문에서 적자를 지속하는 SK이노베이션에는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양사의 핵심 인력이 소송에 매달리느라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한 것도 금액으로 환산 불가한 손실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양사는 소송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법조인력을 채용하기도 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물고 뜯는 사이 중국 내수에서 글로벌 시장으로 영역을 넓힌 CATL, 한국의 핵심인력을 빼간 유럽 노스볼트가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이 포함된 ‘K배터리’를 위협한다.

CATL은 독일 에르푸르트에 첫 해외공장이자 유럽공장을 건설 중이다. 전기차 1위 테슬라와는 협업을 강화하고 있다. 노스볼트는 BMW, 폭스바겐 등의 전폭적 지원과 한국과 일본의 핵심인력 스카웃을 통해 한·중·일 배터리 기업과 격차를 줄여가고 있다. 자체 배터리 생산을 선언한 테슬라의 약진도 위협적이다.

배터리 업계는 글로벌 완성차와 협업을 강화하는 CATL이 빠른 시일 내 LG화학을 중심으로 한 K배터리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망에 위협할 것이란 평가를 내놓는다. LG화학과 삼성SDI 핵심 인력이 배터리를 개발 중인 노스볼트가 치고 올라오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지적이다. 특히 유럽은 아시아 배터리 기업에 종속을 거부하고 ‘배터리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쟁 우위를 위해 시간과 돈이 귀한 시기인데, 소송이 양사의 경쟁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며 "분쟁을 조기에 종결짓지 못한다면 고생끝에 찾아온 K배터리의 전성기도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