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손정미 작가
입력 2020.11.27 23:00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1863년

방 안 백자 화분에는 동백이 붉디붉은 꽃봉오리를 막 벌리려는 듯했다. 소담스런 꽃봉오리 속에 관능적 자태를 품고 있어 감각을 자극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한 색과 은은한 꽃 향이 서로 젖어 들면서 막연히 설레게 했다.
벽에는 자신 있게 휘두른 난(蘭) 그림이 규중의 분위기를 세련되고 품위 있게 이끌었다.
낭창하게 꺾이는가 싶더니 기운차게 뻗은 난이 호기로웠다.
흥선군 이하응이 아내 민씨를 위해 그려준 난이었다.

자영은 안채에서 민씨를 기다리며 서안(書案)에 놓인 <사씨남정기>를 읽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읽은 소설이건만 볼 때마다 재미났다.
소설에 빠진 자영의 두 볼이 갓 따온 복숭아처럼 발그레했다.
호기심 많은 검고 커다란 눈망울은 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섬세하게 보이는 콧날은 정성껏 다듬어 놓은 옥 같았다.
입술은 붉고 투명해서 석류알 같아 달아 보였다.
희고 가느다란 목이 도도해 보일 정도로 곧고 길었다.
열세 살이 된 자영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깊은 바다에서 커진 진주처럼 빛나고 어미 품을 벗어난 어린 사슴처럼 준수했다.

"어머니! 어머니!"
이때 안방 문을 활짝 열며 명복이 숨 가쁘게 뛰어 들어왔다.
"어!"
급히 들어온 명복은 자영을 보고 놀라 넘어질뻔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자영을 보자 명복은 할 말을 잊었다.
어여쁜 소녀였다.
명복은 동생을 들쳐업고 코를 훌쩍거리는 계집아이들은 봐 왔지만 양갓집 소녀를 바로 코 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고운 남색 치마에 진분홍 저고리를 입은 자영은 동백꽃이었다.
명복은 얼굴이 빨개져 어쩔 줄을 몰랐다.
남녀가 칠세부동석인데.
명복은 부끄러워서인지 온돌방이 더워서인지 온몸이 달아올랐다.

자영은 명복을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명복의 콧날은 시원하게 내리뻗었다.
어깨와 다리는 책보다 달리며 놀기를 좋아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냉기에 튼 손이 붉고 거칠었다.
명복의 손에는 바깥에서 날리고 온 연과 얼레가 쥐어져 있었다.

자영은 책을 옆으로 물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명복이냐?"
명복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꿈쩍 놀랐다.
‘씨이- 누군데 이름을 함부로 불러!’
명복이 씩씩거릴 때 어머니 민씨가 나타났다.
"자영이가 왔구나."
민씨는 자영과 아들의 어색한 분위기에 얼떨떨해하며 자영을 반겼다.
민씨를 본 자영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호리호리한 몸매였다.
"인사드려라 안국동 아주머니다."
"네?"

자영의 어머니 한산 이씨는 남편인 민치록이 돌아간 뒤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다.
자영과 이씨는 3년 상을 마치고 여주를 떠나 한양 안국동으로 옮겨왔다.
민씨의 남동생 승호가 자영의 오빠가 되면서 민씨와 자영도 자매가 되었다.
열두 살이 된 명복은 자영에게 조카가 되었다.
명복은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이었다.
명복은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몸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알 수 없는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해 12월 8일(음력) 철종이 승하했다.
철종이 마지막 숨을 거두자마자 조대비는 임금의 옥쇄를 재빨리 거두어들였다.
옥쇄를 쥔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괴한이라도 나타나 자신을 베고 옥쇄를 탈취해가지 않을까 벌벌 떨었다.
조대비는 옥쇄를 숨기고 나서야 겨우 숨을 쉬기 시작했다.
찬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그제서야 뿌옇던 눈앞이 제대로 보였다.

끄으윽-
조대비는 짐승 소리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으며 가슴을 탕탕 쳤다.
남편인 효명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승하한 뒤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시아버지(순조)가 꺾지 못한 안동 김씨 세족들은 조대비의 일가인 풍양조씨 일족을 견제하고 파괴했다.
조대비는 아들 헌종이 자신의 무릎에서 죽어갈 때 옥쇄부터 챙기던 시어머니(순원왕후 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동 김씨의 선봉에는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있었고, 이들은 후사 없이 돌아간 헌종의 후계자로 철종을 맞아들였다.
유배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강화도령’ 원범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안동 김씨는 철종에게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해 세도를 이어갔다.
철종은 국정을 장인인 김문근과 ‘외아저씨’인 김좌근에게 맡겼다.
철종은 신하에게 요직을 임명할 때도 "교동 아저씨(김좌근)가 아는 일인가"라며 물었다.
안동 김씨는 한양의 자하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자하동을 ‘자동’이라고도 불렀는데 사람들이 빨리 부를 땐 ‘장동’이라 들렸다.
그래서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라 불렀다.

조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만 먼저 돌아가지 않았어도 왕비에 오를 수 있었던 처지였다.
시아버지인 순조의 허락 아래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는 왕과 다름없었다.
조대비는 조만영의 딸로, 안동 김씨를 거둬내고 풍양 조씨의 세도를 예고했다.
머리를 조아리며 굽신대던 사람들.
효명세자가 즉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조대비를 둘러싸던 사람들이 무섭게 빠져나갔다.
신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나인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조대비는 아들인 헌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안동 김씨 세력을 완전히 도려내지 못했다.
헌종의 죽음으로 다시 하루하루를 가슴 졸이며 살아왔다.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다음 왕을 지정할 권한이 왕궁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에게 돌아왔다.
조대비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권력은 아슬아슬한 비상과 같아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신묘하게 쓴다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었다.
권력을 안고 반 발자국만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조대비는 권력의 신산함을 누구보다 뼈져리게 느끼며 살아왔기에 그 무서움과 비정함을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호랑이 등에 탄 형세가 됐다.
거꾸러뜨리지 않으면 집안이 거꾸러졌다.

조대비는 은밀히 손을 내민 흥선군 이하응도 믿을 수 없었다.
언제 등 뒤에서 비수를 꽂을지 몰랐다.
하지만 안동 김씨라는 거대한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려면 잡아줄 손이 필요했다.
그 손이 흥선군 이하응이었다.
영조의 증손인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
안동 김씨 세력들이 왕통의 씨를 말려버린 상황이었다.
왕위 계승의 가능성이 있는 종친은 역모로 얽거나 서학(천주교)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안동 김씨의 칼날을 피해 몸을 보전해온 이하응은 극도로 조심했다.
조대비에게는 흥선군 이하응의 손이 필요했다.
뜬눈으로 밤을 샌 조대비가 영의정 김좌근을 비롯해 밖에서 기다리던 대신들을 불렀다.
조대비의 눈에서 광채가 흘렀다.
조대비는 한글로 된 교지를 내렸다.
"흥선군의 제2자 명복이 익종(효명세자)의 대통을 잇게 하라!"

(12월 4일 23:00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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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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