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테크] 누가 감히 하찮다 했나... 4인치 골프티의 세계

김세영 기자
입력 2020.12.19 06:00
초창기 잔디와 흙 쌓아 티샷… 1920년대부터 티 널리 보급
선수마다 티높이 각각… 최근 플라스틱 티 환경문제도 대두

티샷을 할 때 골프 볼을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하는 티는 골프 장비 중에서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물품이 아닐까 싶다. 한 번 사용하고 부러져도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고, 어디론가 튀어 보이지 않아도 굳이 찾으려 들지도 않는다. 티가 없어도 동반자나 캐디가 종류별로 몇 개씩 내밀며 선심을 베푸니 돈 주고 살 필요도 없다.

다양한 색깔의 티 사진. 티는 골프 용품 중 가장 하찮은 취급을 받지만 중요도를 따지면 클럽과 볼 다음이다. / 골프다이제스트
그런데 중요도를 따져보면 어떨까. 골프채와 볼은 라운드 중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고, 그 다음은 뭘까. 장갑, 신발? 사실 이 둘은 없다고 해서 라운드에 크게 지장을 받지는 않는다. 티는 어떤가. 우선 당장 드라이버 티샷을 날릴 수가 없다. 우드나 아이언 티샷은 티가 없어도 어느 정도 가능은 하겠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너무 저렴하고 흔하기에 그 소중함을 간과하고 있던, 바로 그 티에 관한 이야기다. 골프 초창기 시절에는 오늘날과 달리 퍼팅그린과 티잉 그라운드의 구분이 없었다. 1744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리스 지역의 ‘젠틀맨 골퍼스 오브 리스(오늘날 ’아너러블 컴퍼니 오브 에든버러 골퍼스‘가 됨)’ 클럽이 13개 항으로 이뤄진 세계 최초의 골프 룰을 제정하는데 그 첫 번째 항이 티샷에 관한 것이다. "티샷은 홀에서 한 클럽 이내 범위에서 해야 한다." 퍼팅을 마친 후 바로 그 옆에서 티샷을 했다는 의미다.

두 번째 항도 티샷에 관한 것이다. "티업은 지면 위에 해야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잔디나 흙을 원뿔 형태로 쌓고 그 위에 볼을 놓고 티샷을 했다. 잉글랜드 출신의 거구의 장타자로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로라 데이비스(57)는 지금도 웨지로 티잉 그라운드를 단 번에 쩍하고 찍은 뒤, 불룩 올라온 잔디와 흙으로 티를 만들어 사용하는 옛 방식을 고수한다.

로라 데이비스는 여전히 잔디와 흙을 쌓고 그 위에 볼을 올려 티샷을 날리는 옛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사진은 2018년 US시니어 여자오픈 당시 로라 데이비스가 쌓은 잔디 티 모습. / USGA 트위터 영상
18세기 후 그린을 다음 홀의 티잉 그라운드로 사용하던 이런 관행은 점차 사라졌다. 대신 그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특별히 설치된 작은 잔디 구역으로 이동해 티샷을 날렸다. 클럽과 구두의 스파이크로 인한 퍼팅 그린의 손상도 줄었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플레이어들이 그린에서 이동하면서 플레이 속도가 신속해졌다.

그렇게 해서 생긴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모래와 물을 섞어 만든 샌드티(sand tee)를 사용했다. 샌드티를 만들기 위해 모래를 휴대용 박스에 넣고 다녔다. 그런데 번거롭다 보니 티잉 그라운드에 모래가 가득 든 상자를 비치했다. 티박스(tee box)의 출현이다. 티박스는 티잉 구역을 표시하는 역할도 했다. 이때 모래를 일정한 높이로 쌓기 위한 틀도 고안됐다. 드라이버를 위한 틀은 조금 높았고, 아이언 용 틀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현대적인 티가 나오기 시작한 건 1800년대 후반부터다. 티에 관한 최초의 특허가 1889년 스코틀랜드에서 나왔고, 1892년에는 최초로 지면을 뚫는 ‘퍼텍텀’이라는 티가 개발됐다. 1899년에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흑인 치과의사인 조지 그랜트가 볼이 떨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나무 티 위에 고무를 사용한 티를 개발해 특허를 받았지만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통과 습관 때문에 여전히 샌드 티가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다 1920년대 초반 윌리엄 로웰이 프로골퍼인 월터 하겐과 조 커크우드를 고용해 펼친 마케팅 영향으로 나무티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로웰은 처음에는 티를 녹색으로 만들었지만 곧 눈에 잘 띄는 붉은 색으로 바꾸고 이름을 ‘레디티(Reddy Tee)’라고 했다. 로웰이 레디티로 특허를 받은 건 1925년의 일이다.

1889년 최초로 특허를 받은 티, 1892년 최초로 지면을 뚫는 방식으로 특허를 받은 티, 1925년 윌리엄 로웰이 특허를 받은 현대적인 모습의 티(왼쪽부터). / 위키피디아
현대적인 티의 보급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따로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남성 골퍼들의 비뇨기 관련 질병이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모래나 흙으로 티를 만들 때는 손에 각종 세균이 잔뜩 묻을 수 있었다. 더구나 모래와 흙에는 각종 동물이나 곤충의 배설물 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남성 골퍼들은 라운드를 하다 소변이 급하면 한적한 곳에 가서 볼 일을 봤고, 그 때 손에서 세균이 옮겨졌다는 것이다. 티를 사용하면서 이런 위생적인 문제가 현저히 감소했다는 주장이다.

티는 단순하고 작지만 엄연히 골프 용품인 만큼 규격이 정해져 있다. 규칙 상 티의 최대 길이는 4인치(101.6㎜)인데 선수들에 따라 티의 크기나 꽂는 높이가 제각각이다. 탄도나 구질에 따라 높이를 달리 한다.

국내 남자 프로골퍼 중 가장 긴 티를 사용하는 허인회의 티샷 모습. 10㎝의 롱 티를 사용하는 그는 1㎝ 정도만 지면에 박아 9㎝ 높이에 볼을 올려놓은 뒤 상향 타격을 한다. / JNA한석규
국내에서 가장 긴 티를 사용하는 선수는 허인회(33)다. 2014년 역대 최초로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장타왕에 오른 그는 규칙이 정한 최대 길이의 티를 사용한다. 약 10㎝의 티를 1㎝ 정도만 지면에 박아 9㎝ 높이에 볼을 올려놓는다. 일반적인 선수들보다 3~5㎝ 정도 높다.

허인회 선수는 "백스핀 양을 줄이기 위해 로프트 각도가 6도인 드라이버를 사용한다. 하지만 볼의 탄도가 낮아지는 단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높은 티를 사용해 상향 타격을 한다"고 했다.

허인회와 완전히 대비되는 스타일의 골퍼가 지금은 은퇴한 김대섭(39)이다. 그는 현역 시절 티 높이를 1㎝ 정도로 낮게 꽂고 티샷을 하곤 했다. 볼의 탄도를 낮춰 바람도 덜 타고, 실수가 있더라도 페어웨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있었다.

티는 재질에 따라 크게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나뉘는데 프로 골퍼들은 대부분 나무티를 선호한다. 클럽이 빠져나가는 데 저항이 적고 부러져야 클럽 손상도 없기 때문이다. 고급 나무티는 오동나무와 단풍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플라스틱 티는 내구성이 좋지만 겨울철 등 언 땅에서 사용하면 티가 빠져 나오지 못해 클럽 헤드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플라스틱 티의 환경오염 문제가 이슈가 되기도 한다. 잉글랜드의 유서 깊은 로열 노스 데번 골프클럽은 지난 1월부터 환경 보호를 위해 ‘플라스틱 티’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플라스틱 티가 야생동물의 생명에 큰 위협이 된다는 게 이 클럽의 설명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유명 그룹의 창업주는 티샷 후 티를 꼭 찾았다고 한다. 타인에게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물건도 누군가에는 귀하고, 알고 보면 많은 쓰임이 있을 수 있다.

김세영 기자 sygolf@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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