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급변한다. 미국 정부가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SMIC를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새해부터 슈퍼사이클(최대 호황기)을 맞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국내 반도체 업계는 시장 상황에 맞는 탄력적 대응으로 초격차 고삐를 죈다.

2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최근 SMIC를 수출금지 대상에 포함시켰다. SMIC가 미 공급업체로부터 핵심 부품을 들이려면 미 상무부 특별 허가가 있어야 한다. 사실상 SMIC의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진 셈이다. 상무부는 SMIC가 10나노미터(㎚) 이하 반도체 생산 기술 접근 차단 원칙까지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항공사진 / 삼성전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항공사진 / 삼성전자
10나노 이하 제품 생산이 가능한 업체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두곳이다. SMIC에 대한 제재 강화로 파운드리 가격 인상이 촉발돼 양사에 수혜가 집중될 전망이다.

그동안 인텔 중앙처리장치(CPU)를 써왔던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는 자체 칩 개발로 ‘탈(脫) 인텔’을 선언했다. 자체 설계한 도면을 파운드리 업체에 맡겨 생산하기로 했다. TSMC와 삼성전자가 고스란히 반사이익을 챙길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 상무부의 블랙리스트 발표를 계기로 SMIC의 10나노 이하 연구 개발 진행이 어려워졌다"며 "인텔의 몰락까지 더해지면서 새해 파운드리 시장은 TSMC와 삼성전자의 과점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새해에는 글로벌 D램 시장이 슈퍼사이클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룬다. 미 마이크론의 대만 생산라인 정전 영향으로 시장 내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가속화 해 D램 가격 상승 추세도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D램 세계 1·2위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초격차 전략이 빛을 발하며 새해 실적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1년 1분기 D램 평균판매가격(ASP)은 PC·모바일용 제품이 보합세를 보이고, 서버(0~5%)·그래픽(5~10%)·컨슈머(0~8%) 등 제품 가격이 반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D램 가격은 최근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22일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D램(DDR4 8Gb) 현물가격은 15일 기준으로 6개월 만에 3달러를 넘었다. 22일에는 3.4달러를 기록하며 11월말 2.7달러에서 25%쯤 급등했다. 현물가격은 메모리반도체 고정거래가(공급 계약 가격)보다 3개월쯤 앞서 시장 분위기를 보여줘 미래 업황을 예상할 수 있는 선행지표로 해석된다.

SK하이닉스 생산라인 모습 /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생산라인 모습 / SK하이닉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021년 세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도입한 차세대 D램 출시로 시장판도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EUV 공정은 반도체 포토 공정에서 극자외선 파장의 광원을 사용하는 것이다. 기존 불화아르곤(ArF)의 광원보다 파장의 길이가 짧아(10분의 1 미만) 반도체에 미세 회로 패턴을 구현할 때 유리하다. 성능과 생산성도 높일 수 있다.

EUV 장비는 대당 가격이 1500억∼2000억원으로 높아 첨단 미세공정 싸움이 치열한 시스템 반도체 제작에만 사용했다. 하지만 고성능 D램 생산을 위해 칩 크기를 줄여 집적도를 높여야 하는 기존 방식에 한계가 오면서 EUV 기술 도입이 대세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3월 1세대 10나노급(1x) DDR4에 EUV 공정을 시범 적용해 고객 평가를 마쳤다. 차세대 D램인 DDR5와 모바일용 LPDDR5은 새해 하반기 양산을 시작한다. 이 D램은 기존 제품보다 속도가 1.8배가량 빠른 4세대 10나노급(1a)으로 EUV 장비를 쓰면 기존 DDR4(1x)보다 12인치 웨이퍼당 생산성을 2배로 높일 수 있다.

SK하이닉스도 창사 이래 처음 경기도 이천 캠퍼스에 EUV 장비 도입을 진행 중이다. SK하이닉스는 한두대의 EUV 장비로 2021년 하반기 이후 양산할 4세대 10나노급(1a) DDR5부터 EUV 기술을 도입하면서 생산 효율과 수율을 평가한 후 활용도를 높일 계획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D램은 CPU에 비해 가격이 낮아 원가경쟁력 측면에서 EUV 같은 고가 장비 도입에 부담이 있었다"면서 "공정 효율을 높여 장비에 투입한 원가를 상쇄해야 하는데, 새해 EUV 도입에 따른 성공 여부가 D램 시장 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와 SK하이닉스는 최근 슈퍼사이클에 대비하기 위한 대대적 조직개편도 마쳤다.

삼성전자는 12월 초 인사에서 반도체 핵심사업부인 메모리사업부와 파운드리사업부에 각각 이정배 사장과 최시영 사장을 승진시켜 세대교체에 나섰다. SK하이닉스도 박정호 부회장의 가세로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SK하이닉스는 10월 인텔 낸드사업부 인수를 통해 낸드사업 확대에도 나섰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