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덕'(Otaku)은 해당 분야를 잘 아는 '마니아'를 뜻함과 동시에 팬덤 등 열정을 상징하는 말로도 통합니다. IT조선은 애니메이션・만화・영화・게임 등 오덕 문화로 상징되는 '팝컬처(Pop Culture)'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어린시절 열광했던 인기 콘텐츠부터 최신 팝컬처 분야 핫이슈까지 폭넓게 다루머 오덕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줄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1996년작 ‘천공의 에스카플로네(天空のエスカフローネ·The Vision of Escaflowne)'는 이세계(異世界) 판타지 작품인 동시에 슈퍼로봇물로 분류되는 애니메이션이다. 드래곤을 퇴치하기 위해 만든 탑승형 로봇 ‘메레프'와 ‘가이메레프'가 등장한다. 제목의 ‘에스카플로네'는 피(血)의 계약으로 움직이는 거대 가이메레프란 설정이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TV애니메이션 포스터 이미지. / 선라이즈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TV애니메이션 포스터 이미지. / 선라이즈
에스카플로네 주제가 ‘약속은 필요없어(約束はいらない)’는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16살 고등학생이자 무명 성우였던 ‘사카모토 마야(坂本真綾)’는 이 노래로 가수 데뷔하고 인기 성우 대열에 오르게 됐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애니메이션 오프닝 영상. / 유튜브

애니메이션은 지구의 평범한 주인공 소녀 ‘히토미'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고등학생 1학년이자 육상부 단거리뛰기 선수인 ‘가이아'라 불리는 다른세상에서 온 주인공 소년 ‘반'과 만나 그와 얽히면서 가이아 세상으로 날아가고 만다.

파넬리아 왕자 반은 왕위 계승을 앞두고 자이바하에서 온 거대로봇 가이메레프와 용격대의 침공으로 자신의 왕국이 멸망하는 것을 목격한다. 몰락 왕자가 된 반은 대대로 왕가에 전해져 내려온 가이메레프 ‘에스카플로네'와 피의 계약을 맺고 히토미와 기사 아렌과 함께 가이아 세상을 모험하게 된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DVD 패키지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DVD 패키지 일러스트. / 아마존재팬
애니 ‘천공의 에스카플로네'는 건담 시리즈 제작사로 유명한 선라이즈가 만들었다. 감독은 ‘수신 라이거', ‘신세기GPX 사이버포뮬러' 연출과 스토리보드를 담당했던 아카네 카즈키(赤根和樹)다.

선라이즈에 따르면 에스카플로네 애니메이션은 기획 당시 ‘로봇 애니메이션에 순정만화 요소를 융합한다'는 컨셉으로 출발했다. 기획 도중 기계거인 에스카플로네는 로봇의 형태가 아닌 드래곤처럼 날개를 가진 변신이 가능한 전투기로 그려졌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는 판타지와 과학, 연예감정과 운명 등 다채로운 테마가 얽히고 섥힌 스토리로 만들어졌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국립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오케스트라가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도 당시 화제를 모았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한장면. / 야후재팬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한장면. / 야후재팬
에스카플로네는 일본 TV애니메이션 중 3D 컴퓨터그래픽이 사용된 첫 작품으로 기록됐다. 그래픽은 애니메이션 1화에서 등장한 드래곤에 사용됐다.

애니메이션은 그림(작화) 품질이 높기로도 유명하다. 작화감독을 맡은 오사카 히로시(逢坂浩司)를 필두로 소네 히로키(曽根宏紀), 카와모토 토시히로(川元利浩) 등 수준급 애니메이터가 다수 투입됐다. 이들은 1998년 선라이즈로부터 독립해 자체 애니 제작사 ‘본즈(Bones)’를 설립했다. 본즈는 클램프 원작 ‘엔젤릭 레이어', ‘강철의 연금술사', ‘크라우 팬텀 메모리’, ‘오란고교 호스트부', ‘에우레카 세븐', 극장판 ‘카우보이 비밥' 등 인기작을 탄생시켰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일러스트. / 야후재팬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일러스트. / 야후재팬
애니메이션 업계에 따르면 에스카플로네는 흥행보증이 어려운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인 탓에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움직이는 동화 파트 영상이 적다. 대신 전체적으로 느린 템포의 영상을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과 화면 구성을 통해 보완해 전체적인 애니메이션 품질을 높였다.

에스카플로네 메카닉 디자인은 야마네 키미토시(山根公利)가 맡았다. 야마네는 메카닉디자이너란 직업을 탄생시켰다 평가받는 오오카와라 쿠니오(大河原邦男)를 동경해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든 인물이다. 야마네는 에스카플로네에 앞서 ‘기동무투전 G건담' 메카닉 디자인에 참가했고, 에스카플로네 이후 ‘카우보이 비밥', ‘기동전사 건담 SEED’에 메카닉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는 일본 현지에서 방영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묻히는 듯 했으나, 한국을 포함한 해외 팬들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아 2000년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등장했다.

극장판 에스카플로네 일러스트. / 야후재팬
극장판 에스카플로네 일러스트. / 야후재팬
극장판 ‘에스카플로네(Escaflowne)’는 한국 영화 수입·배급사 AFDF와 스타맥스가 영화 제작 출자에 참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 애니 제작사 선라이즈 입장에서는 이 작품이 첫 번째 한국·일본 공동출자 작품으로 기록됐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당시 영화 제작에 투입된 예산은 3억엔(32억원)이다. 영화의 미국지역 배급에는 반다이 엔터테인먼트가 참가했다.

극장판 에스카플로네는 한국기업이 출자회사로 참가한 탓에 일본판 DVD와 블루레이에도 한국어 자막과 음성이 포함됐다.

극장판 에스카플로네 한장면. / 야후재팬
극장판 에스카플로네 한장면. / 야후재팬
에스카플로네 극장판은 원작인 TV판과 스토리와 설정이 크게 달라진 것이 특징이다. 여자 주인공 히토미의 경우 TV판에서 단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하지만, 극장판에서는 육상부 선수였지만 다리를 다쳐 육상을 포기했다는 것으로 그려졌다. 살고 있는 곳도 TV판의 쇼난(湘南)이 아닌 도쿄로 바뀌고, 단순한 여주인공이 아닌 기계거인 에스카플로네를 부활시키는 ‘날개의 신(翼の神)’으로서 소환되는 방식으로 가이아 땅을 밟게된다. TV판의 활기찬 성격도 극장판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우울증 기미를 보이는 여고생으로 설정이 변경돼, 극장판 마지막 부분에서 살아가는 의미와 활기를 되찾게 되는 방식으로 스토리가 구성됐다.

피의 계약으로 움직이는 기계거인 에스카플로네

애니메이션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에는 ‘메레프'와 ‘가이메레프'라 불리는 기계 거인이 등장한다. 메레프는 가이아 세상의 사람들이 드래곤을 퇴치하기 위한 만든 로봇이지만, 시간이 흘러 각국의 군사병기로서 활용되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계거인 가이메레프 ‘에스카플로네’. / 야후재팬
기계거인 가이메레프 ‘에스카플로네’. / 야후재팬
메레프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탑승해 조종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동력원은 ‘에너지스트'라 불리는 물질이다. 메레프 중에는 2배 이상 크고 여러개의 에너지스트를 탑재한 상위기종도 존재한다.

남자 주인공 반이 탑승하는 ‘에스카플로네'는 ‘가이메레프'로 분류된다. 가이메레프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그려지며 주로 왕족이 사용한다. 탑승자의 피를 가이메레프에 주입하는 ‘피의 계약'을 통해서 가동되는 탓에 계약을 한 자만이 조종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에스카플로네는 반의 고향인 파넬리아 왕국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가이메레프다. 극장판에서는 탑승자 반의 피를 대량으로 소비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연출됐다.

가이메레프 ‘에스카플로네'. / 선라이즈
가이메레프 ‘에스카플로네'. / 선라이즈
에스카플로네는 신축성이 있는 검 두 자루를 등에 보관하고 있다. 비행체로 변신이 가능한다. 변신한 모양이 드래곤을 닮았다. 변신하면 파일럿이 드래곤 모양 비행체의 등 부분에 위치하게 된다. 가이메레프는 조종사의 생각을 읽어내는 기능이 탑재됐다. 이를 통해 비행 중 고속비행형태로 한 번더 변신할 수 있다.

선라이즈 설정 자료에 따르면 가이메레프는 전설 속 종족인 이스파노 족이 만들었다. 일반적인 메레프와 달리 150년 이상의 세월을 통해 완성된다.

희소성이 높은 기체인 만큼 수리비도 만만치 않다. 설정 자료에 따르면 에스카플로네 수리비용은 5000만길드다. 5000만길드는 부하기사들의 2000년치 월급과 맞먹는다.

가이메레프 전투 장면. / 야후재팬
가이메레프 전투 장면. / 야후재팬
가이메레프는 숫자는 적지만 각 나라마다 존재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에스카플로네 외에도 ‘쉐라자드', ‘샤파리스', ‘테르세이로', ‘아르세이데스', ‘테이링', ‘오레아데스' 등이 등장하며, 게임 콘텐츠를 통해 ‘나이아데스'라 불리는 게임 전용 가이메레프가 출연했다.

김형원 기자 otakukim@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