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네트워크 장비 A사는 보안기능확인서 발급 지연으로 고초를 겪었다. 보안기능 확인서는 국가보안기술연구소가 국가·공공기관에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려는 기업 제품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제도다. 새로 적용되는 제도에 따라 국가·공공기관에 네트워크 장비를 공급하기 위해서 인증서를 발급받아야 했지만, 적체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주무부서와 기관에 인증 신청이 쇄도하면서 인증서 발급이 장기간 지연됐다. 지난해 연초 인증서를 신청한 A사는 지난달이 돼서야 인증서 발급 과정이 끝났다.

피해는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었다. 1년 가까이 보안기능확인서 미보유로 인해 공공사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A사의 매출은 급락했다. 그간 수주해 온 노후장비 교체 사업도 타 기업에 내주고 말았다.

문제의 시작은 정부의 안일한 제도 운용이었다. 애초에 국제공통기준(CC) 인증 대신 보안기능확인서를 의무로 내세우려면, 주무부서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신청 쇄도를 예상했어야 했는데 미흡했다. 담당자 지정에만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보내며 적체 현상을 야기했다. 문제제기가 이어졌지만, 분기마다 한 번 개선안을 내놓으며 1년 가까이 상황을 좀처럼 개선하지 못했다.

 / 국가보안기술연구소
/ 국가보안기술연구소
6일 장비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보안기능확인서 인증 적체 문제가 해소되는 중이다. 국내 장비 업체들이 주무부서인 국가정보원과 검증 주관기관인 국가보안기술연구소에 인증 속도를 내 달라고 지속해서 건의했지만, 이제야 속도를 내는 것. 업체들은 보안기능확인서가 발급되고 있으니 문제가 해결된 것 아니냐는 접근은 곤란하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1년 동안 사업 위축과 계약 미이행으로 인한 신뢰 손상을 입었는데도 뾰족한 재발 방지책이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제도 시행 초기, 짧은 준비 기간과 평가·시험기관의 시행착오로 대기시간이 길어지면서 적체 현상이 시작됐다. 검증 주관 기관인 국가보안기술연구소의 담당자 지정에만 20여일 가까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진행됐던 인증 심사 횟수도 문제였다.

주무부서는 적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계 기업들이 제도 시행 이전에 대부분 갖고 있던 보안기능 확인서를 유예해줬다. 결과적으로 보안인증서 발급지연으로 공백을 겪는 동안 외국계 기업들은 기존 인증서를 활용해 시장을 잠식하면서 국내 기업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을 마주했다. 네트워크 분야 역차별이라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국가정보원과 관련 기관은 적체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인증 심사 횟수를 월 2회로 늘리고, 보안기능 확인서 발급 가이드를 배포했다. 해당 조치들에도 적체 현상이 지난달까지 이어지자 보안기능 확인서 유효기간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기존 최대 3년(2년+ 연장1년)이었던 인증서 유효기간을 2021년 이후 발급받는 제품의 경우, 발급일로부터 5년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A사 관계자는 "지난달 말 가까스로 인증서를 모두 발급받았지만, 적체 현상이 개선됐으니 문제가 해결됐다는 접근은 곤란하다"며 "1년 가까이 보안기능확인서 미보유로 인해 사업에 참여할 수조차 없었다. 연말에 인증서가 발급됐어도 1개월이 채 되지 않는 공공기관 대상 영업으로 그간 손해를 메꾸기는 어렵다. "2019년 대비 지난해 공공기관 매출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정부의 안일한 정책 운영으로 인증서를 발급받지 못한 국내 기업들의 사업은 크게 위축됐다. 이로 인해 신규제품 개발이 차질을 빚고, 장기적으로 국내 네트워크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악영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향후 관련 정책 수립·시행 시 예상되는 부작용을 철저히 대비하고, 대상 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유예기간을 부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업체들은 이달 발표 예정인 과기정통부 국제공통기준(CC) 평가 개선안에 보안기능확인서 제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재발 방지 대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네트워크협회 관계자는 "협회 차원에서 관련 애로사항을 주기적으로 조사해 확인된 애로사항은 국정원 등에 전달하고 있다"며 "산업계의 의견을 모아 앞으로도 정책 및 절차 개선에 지속해서 나설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김동진 기자 communicati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