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슈퍼사이클(대호황)을 맞은 가운데 삼성호(號)가 최대 7년간 선장없이 표류한다. 최근 실형을 선고 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형 집행 종료 후에도 5년간 회사에 재직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총수의 장기 부재로 속도감 있는 의사결정에 차질을 빚는 등 경영 어려움에 처했다.

1월 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고등법원에 도착해 입장하는 모습 / IT조선
1월 1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고등법원에 도착해 입장하는 모습 / IT조선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무부는 15일 이 부회장 측에 취업제한 대상자임을 통보했다. 특정 경제범죄 가중처벌법(특경법) 14조에는 5억원 이상 횡령·배임 등의 범행을 저지르면 징역형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을 받지 않기로 확정된 날부터 5년간 취업을 제한한다.

취업 대상 직군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전부나 일부를 출자한 기관과 그 출연이나 보조를 받는 기관, 유죄 판결된 범죄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업체다.

징역형은 형이 종료된 뒤 5년 간 제한이다. 이 부회장이 2022년 7월 만기 출소하더라도 2027년 하반기에나 경영 복귀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2027년은 이 부회장이 시스템반도체 1위를 목표로 추진 중인 ‘반도체비전 2030’이 종반부에 접어드는 시기다.

이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 1심에서 구속됐다가 2018년 항소심에서 석방된 이후 과감한 투자 행보를 보였다. 2018년 인공지능(AI)·5세대(5G)·바이오·전장부품 등 4대 성장 산업에 3년간 180조원 투자, 4만명 고용 계획을 밝혔고, 실제 달성했다.

2019년 4월에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133조원 투자를 결정했다. 2019년 10월에는 삼성디스플레이가 퀀텀닷(QD) 디스플레이 생산시설 구축과 연구개발에 13조원 투자를 발표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2020년 경기도 평택 반도체 P3라인(3공장) 착공을 시작했다. P3 건설과 설비 투자 비용은 30조원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상 반도체 공장 건설과 설비 반입, 본격 양산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P3라인 가동은 2023년 하반기로 전망된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항공사진 / 삼성전자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항공사진 / 삼성전자
이 부회장은 구속 후인 1월 26일 임직원들에게 보낸 첫 메시지에서 "삼성은 가야 할 길을 계속 가야 한다"며 "투자와 고용 창출이라는 기업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이미 국민들께 드린 약속들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삼성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부회장의 이같은 의지에도 삼성전자의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모습이다. 대규모 투자와 M&A는 방향성만 잡혀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삼성전자는 2020년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 18조8100억원을 달성했지만, 파운드리 1위 대만 TSMC(22조7000억원)에 추월 당했다. TSMC는 올해 30조원 이상 대규모 투자를 예고했다.

TSMC에 맞서 삼성전자도 대규모 투자 및 M&A를 계획 중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로이터 등 외신은 최근 잇따라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증설을 위해 170억달러(19조원) 이상 투자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아직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스틴 외에도 미국 곳곳의 러브콜이 이어지있지만 이해 득실을 따지며 애리조나, 뉴욕, 한국 등을 놓고 여전히 고심 중이다.

최윤호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은 1월 28일 열린 2020년 4분기 실적발표에서 "현재 대내외 불확실한 상황으로 실행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지금껏 준비한 것을 토대로 정책 기간 내(3년) 의미 있는 규모의 M&A와 시설투자 확대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M&A를 노릴 만한 회사로 네덜란드의 NXP, 스위스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미국의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일본의 르네사스 등을 언급하지만 아직 가시화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재계는 삼성전자의 투자 및 M&A에 속도가 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이 부회장의 부재를 꼽는다. 삼성전자가 최악의 경우 2027년 하반기까지 총수 없이 표류한다면 적기 투자를 놓쳐 경쟁자를 따라잡지는 못하고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예상되면서 주요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와 M&A로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며 "삼성전자 역시 투자에 속도를 내야하는 시기인데, 리더십 부재로 보폭을 넓히지 못하고 경향에서 벗어난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부회장이 취업제한에서 벗어나려면 사면복권되거나 법무부에 별도의 취업승인 신청을 해야한다. 특경법은 취업제한 대상자가 법무부에 취업 승인을 신청해 승인을 받은 경우에는 제한을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부회장 측이 취업승인 신청을 하면 외부 위원들로 구성된 법무부 특정경제사범관리위원회의 심의 후 장관 최종 승인을 통해 제한이 풀릴 수도 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