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전쟁의 공포를, 고독을, 배고픔을 극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국 해협에 위치한 채널제도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메리 앤 섀퍼와 애니 배로스의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덴슬리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점령된 섬에서 온전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은 고난의 시기 속에서도 북클럽이라는 작은 즐거움과 희망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갖습니다.
평생 사서로 일하면서 평생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을 쓰기를 기원한 저자가 남긴 단 한 권의 소설책. 이 책을 읽으면서 고립된 섬에서 서로를 보듬었던 독서 클럽의 이웃들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1. 책은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2.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에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3.제가 찬탄하는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 바로 여기입니다. 독일군이 상륙했던 날에도 이 무장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을 실은 비행기가 연달아 오고 부두에도 쏟아져 들어오던 걸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제가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집고 밖으로 나가 상황에 맞설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심장이 신발 아래로 가라앉듯 축 쳐져 있을 게 아니라요.
4.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급기야 남은 장작도 떨어졌지요. 고된 노동으로 음울한 낮을 보내고 지루함으로 컴컴한 밤을 지냈습니다. 모두가 영양부족으로 핼쑥해지고 이 상황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 하는 의문으로 침울해졌습니다. 우리는 책과 친구들에게 매달렸습니다. 책과 친구는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으니까요.
5.6년간 전쟁을 겪고 전쟁에 대한 글을 쓰며 살았으니까 이제는 뭐든 좋으니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건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길 바라는 것과 같아요. 전쟁은 이미 우리 삶의 이야기가 됐고 그 이야기를 뺀 삶은 불가능하죠.
6.독일군은 특히 고기에 민감했습니다. 병사들을 먹일 고기가 암시장으로 흘러가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요. 누군가의 돼지가 새끼를 치면, 독일군 농업 담당 장교가 찾아와 새끼의 수를 세고 각각 출생증명서를 발급하고 장부에도 기록했습니다. 만약 돼지 한 마리가 자연사하면 농업 담당 장교에게 보고해야 했죠. 그러면 그가 다시 잡아와서 돼지 사체를 살펴보고 사망증명서를 발급했습니다.
7. 독일군 점령기 중반이 되자 비누가 귀해져 한 사람당 한 달에 한 개의 비누만 허용됐습니다 .프랑스 점토로 만든 비누로 빨래통 안에 놓인 꼴이 마치 사체같았습니다. 거품도 일지 않았어요.그저 세정 효과가 있기를 바라면서 문지르는 수밖에 없었죠. 꺠끗하게 지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조금 덜하거나 더할 뿐 모두가 몸도 옷도 더러운 데 익숙해졌지요. 설거지나 빨래용으로 가루비누를 조금씩 받았습니다만 기가 차서 웃음만 나올 만큼 작은 양이었습니다. 역시 거품은 일지 않았고요.
8.나치군 공군은 런던 대공습 때 건지 섬의 독일 공군도 런던으로 향하던 폭격기 사단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은 밤에만 폭격 비행을 했고 낮에는 세인트피터포트에서 자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시간에 뭘 했는지 아십니까? 미용실에서 손톱손질이며 얼굴 마사지를 했고 눈썹을 다듬고 머리를 말고는 정성스레 매만지기까지 했어요.
9.저는 문학회 모임을 매우 아낍니다. 점령기 시절을 견딜 힘을 그곳에서 얻었으니까요. 세네카의 편지들 덕에 저는 훗날 겪어야 할 모든 일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0.노동자 수천 명이 이곳에서 죽었어요. 나는 최근에야 이렇게 비인간적인 대우가 아이히만이 의도적으로 추진한 정책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는 자신의 계획을 '고갈에 의한 죽음'이라 칭했고 그대로 실행했지요. 힘든 노동을 시키고, 소중한 음식을 그들에게 낭비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두라. 죽으면 유럽 점령국 어디서든 다른 강제노동자로 대체할 수 있고 그렇게 되리라. 백 명이 넘는 남자들이 몸을 씻을 수도는 하나뿐이었지요.
이은주 기자 leeeunj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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