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실을 즐겨 찾던 1990년대 일본 SNK가 만든 대전 액션 게임 ‘더 킹오브 파이터즈 95’는 주특기 게임 중 하나였다. 이 게임은 기를 꽉 채우면 필살기를 쓸 수 있었고, 체력 게이지가 70% 이상 깎인 점멸 상태에서는 데미지가 훨씬 큰 ‘초필살기’를 쓸 수 있었다.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일격에 역전 가능한 기술인 셈이다.

하지만 초필살기를 적중시킨 적은 많지 않았다. 노림수가 뻔히 보였던 만큼 상대가 더욱 조심스럽게 대전에 임했기 때문이다. 역전은커녕 한방에 의존하다가 게임을 그르치는 일이 더 많았다.

게임의 특징처럼 일본사에서는 깜짝 한방으로 역전을 노린 사례가 여럿 있다. 일본은 냉전시대 소련과 중국과 경제협력을 맺으며 긴장을 완화하는 기책(남들이 흔히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꾀)을 구사했다. 반면 기습에 성공하면 미국이 원유 수출 협상에 임할 것으로 오판했던 1941년 진주만 공습 사례도 있다.

최근 일본 기업 중에서도 열세를 한방에 뒤집으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전기차와 리튬이온 배터리 부문에서 한중(韓中) 기업에 점차 밀려난 일본 도요타와 파나소닉이 대표적이다.

도요타는 전기차로 전환이 경쟁사 대비 늦었다. 도요타는 2020년 순수 전기차 판매량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한참 밀려났다. 파나소닉 역시 중국과 한국의 공세에 2020년 세계 전기차 탑재 배터리 점유율이 18.5%로 2019년(24.4%) 대비 하락했다.

도요타와 파나소닉은 총 17조원을 투자해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위한 합작법인(JV)을 설립했다. 리튬이온 배터리를 뛰어넘어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를 최초 양산해 게임 체인저가 되겠다는 의지다. 전고체 배터리는 꿈의 배터리로 불린다. 발화 가능성이 제로(0)에 가깝고 안전 관련 부품을 줄여 그 자리에 에너지 용량을 높이는 물질을 채울 수 있어서다.

반면 경쟁사가 그동안 리튬이온 배터리 안정화에 초점을 맞출 것을 감안하면 실패했을 때의 타격도 클 수밖에 없다. 전고체 배터리의 기술이 우수하다고 무조건 기존 배터리 시장을 한방에 뒤엎을 만한 제품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다. 양산 초기 버전 전고체 배터리가 수십년 간 검증을 거쳐온 리튬이온 배터리를 모두 대체할 것이란 전망은 과한 기대다. 배터리 양산성과 가격 대비 적정 성능을 구현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10년 내 판가름 날 일본 기업의 전고체 배터리 올인 전략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국내에서는 최근 LG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소송에서 패소한 SK이노베이션이 눈에 밟힌다. SK는 승산이 있다는 판단 하에 미국 ITC의 최종판결을 기다렸지만 패소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ITC 판결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SK가 판세를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궁극의 필살기다.

SK가 쉽게 승복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ITC 의견서 어디에도 사안의 본질인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았다. ITC는 22건의 영업비밀을 지정하면서도 개별 수입물품이 실제 수입금지 대상에 해당할지에 대해 별도 승인을 받도록 했다.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바라는 배터리 업계의 바람과 달리 SK의 심정도 일견 이해가 간다.

수조원대 규모의 합의는 SK가 오히려 배터리 사업에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중대한 타격이다. SK가 미국에서 10년간 사업을 해도 벌지 못할 금액이기도 하다. 미 정부에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고 항소까지 검토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SK의 판단이다.

SK는 가보지 않은 길을 택했다. 과거 역사적 사례와 달리 한방을 노린 도박성 선택이 아니길 바란다. 또다른 선택지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가능성 높은 생존 전략의 일환이길 기대한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