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발 K배터리 악재의 여파가 오래간다. 세계 전기차 2위 업체가 2030년까지 자사 전기차 80%에 각형 배터리셀을 탑재하기로 한 것은 그만큼 충격적 사건이다. K배터리의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받은 폭스바겐이 갑작스레 변심한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주요 매체와 증권가는 LG에너지솔루션(이하 LG)과 SK이노베이션(이하 SK) 간 미국 ITC 소송이 이번 사태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양사 간 분쟁은 세기의 배터리 소송으로 불릴 만큼 업계의 핫 이슈다. 폭스바겐의 선택과 연관짓기에 적절한 소재이긴 하지만, 이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폭스바겐의 배터리 전환은 LG와 SK 간 소송과 별개로 이미 예정된 일이다. 폭스바겐은 2019년 9월 스웨덴 노스볼트와 전기차 배터리 생산을 위한 합작사를 설립했다. 노스볼트 지분 20% 확보에 9억유로(1조2000억원)를 투자했고, 2023년 말 독일 잘츠기터에서 배터리를 생산한다.

폭스바겐 매출의 40% 이상은 중국에서 나온다. 중국 CATL과 노스볼트는 각형 배터리 제조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에도 CATL과 노스볼트가 각각 유럽과 중국 시장에서 폭스바겐 배터리 내재화의 중심 축이 될 것이란 전망이 있었다.

폭스바겐의 변심이 단순히 예정된 전략이었다고 해석하기에도 부족함이 있다. LG와 SK의 분쟁 과정을 깊숙이 살펴보면 연관성을 짐작할 만한 부분이 나온다. 양사간 소송 여파로 SK 미국 조지아 공장의 배터리 공급이 불안정하다. 폭스바겐 입장에서는 LG가 홀로 득세하는 그림을 원치 않을 수 있다.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은 최근 조지아주 상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새 공장을 짓거나 SK의 배터리 공장 인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SK가 미국에서의 배터리 생산에 차질을 겪더라도 LG가 폭스바겐의 솔벤더(단독공급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솔벤더 체제는 고객사 입장에서 협상 열위에 놓이고 리스크 중 하나다. SK가 미국시장에서 철수할 경우 폭스바겐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은 새로운 배터리 폼팩터 변경이다. 단독 공급원으로 LG를 붙잡는 것이 우선순위는 아니었던 셈이다. 공교롭게도 폭스바겐이 각형 배터리를 본격 전용하겠다는 2023년은 SK가 ITC로부터 부여받은 2년간의 수입금지 유예기간과 일치한다.

LG와 SK는 햇수로만 3년째 법적다툼을 벌였다. 판결에 따라 한쪽에는 호재로 작용할 분쟁이지만, 소송에 전사적 역량을 쏟다보니 양사의 시야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창 신규 시장을 조성하고 고객사를 확보할 시기에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를 갉아먹는 데 집중했고, 그것이 결국 폭스바겐의 역린(군주의 분노 또는 군주가 분개할 만한 그의 약점)을 건드렸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거나 덮어두고 가자는 식의 합의로 분쟁이 끝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양사가 잘못된 곳을 향하며 내리막을 달리고 있다면 이제라도 방향을 틀어야 한다. LG와 SK는 분쟁으로 인한 시장에서의 파급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장기적으로 이득이 되는 전략적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