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주요 고객사의 이탈로 위기를 겪는 인텔은 22조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를 앞세워 파운드리 기업 중 가장 경쟁력 있는 미국 기업이 될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낸다.

인텔의 반도체 생산 기술은 14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m) 단계다. 단기적로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이 미미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핵심 소재·부품의 공급망 재편에 나선 미 정부의 반도체 육성 기조에 힘입어 ‘2인자’ 삼성전자를 위협할 수 있다. 2위 경쟁의 성패를 가르는 것 중 하나는 공급이 제한적인 EUV 노광기를 어느 기업이 더 많이 확보하느냐도 것도 있다. EUV 노광기는 7나노 이하 첨단 공정에 필수다.

자사의 3D 패키징 반도체 제품을 들어보이고 있는 팻 겔싱어 인텔 CEO / 인텔
자사의 3D 패키징 반도체 제품을 들어보이고 있는 팻 겔싱어 인텔 CEO / 인텔
인텔의 새 수장 팻 겔싱어는 24일 온라인 브리핑을 통해 200억달러(22조6100억원)를 투자해 올해 미국 애리조나에 2개의 신규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연내 자사 주력 제품을 모두 10나노 공정으로 전환하고 차세대 7나노 공정에서는 장비 제조사인 네덜란드 ASML과 협력해 최신 극자외선(EUV) 공정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시장에서 인텔의 입지는 위태롭다. 독점 수준이던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선 경쟁사 AMD에 점유율을 야금야금 뺏기고 있고, 애플과 MS 등 주요 고객사가 잇따라 결별을 선언했다. 신공정 개발 지연으로 주력 CPU마저 파운드리 업체에 맡길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하지만 겔싱어 CEO는 최근 수년간 차질을 빚은 차세대 공정 도입이 최근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며 파운드리 사업 진출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구글, 아마존, MS, 퀄컴 등이 지지를 보냈다며 향후 고객사로 발전 가능성을 시사했다. 신설된 파운드리 사업부 수장인 란디르 타쿠르 박사를 사장급으로 임명한 점도 흥미롭다. 인텔 각 사업부는 통상 부사장급 인사가 총괄하는데, 파운드리 사업에 전력을 쏟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1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가 56%, 삼성전자가 18%로 예상된다. 대만의 UMC와 미국의 글로벌파운드리가 각각 7%, 중국의 SMIC가 5%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반도체 업계 일각에서는 인텔의 시장 지위와 자금력을 고려하면 TSMC, 삼성전자와 함께 3강 구도를 형성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TSMC와 삼성전자의 첨단 미세 공정 기술 경쟁이 5나노에 이어 3나노로 향한 가운데 인텔은 당장 7나노 공정에서도 애를 먹고 있다. 인텔의 기술력이 1∼2년 내 이들을 따라잡기엔 버거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자국 반도체 육성 의지를 감안할 때, 인텔이 만만한 도전자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월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 행정명령을 승인하며 미 반도체 자립화를 강조했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 결정도 바이든 정부 기조에 화답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미 CNBC는 "미 정부가 인텔에 세제 지원 등 혜택을 부여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는 투자 확대로 인텔과 초격차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이 삼성전자의 미 오스틴 공장 투자를 앞당기는 도화선이 될 것이란 기대감도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13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13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 삼성전자
장기적으로는 EUV 노광기를 공급받기 위한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수 있다. 이 장비는 7나노 이하 첨단 공정에 필수인데 공급량이 제한적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기업들이 EUV 노광기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다.

ASML은 2019년 EUV 노광기를 26대 독점 출하했다. 2020년에는 최대 35대, 2021년에는 45~50대 출하가 목표다. 가격은 2000억원 안팎으로 일반 반도체 장비 대비 비싸다. 대만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TSMC는 2021년까지 EUV 노광기 50대를 추가 구매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2019년에 10대의 EUV 노광기를 도입했고, 2020년까지 20대 미만의 노광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텔은 2016년 10대 이상의 EUV 노광기를 가장 먼저 구매했지만, 당시 장비 품질 개선을 이유로 실제 도입을 미룬 바 있다.

공급사인 ASML 입장에서는 EUV 노광기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인텔의 구매력을 적극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TSMC,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EUV 노광기를 확보하기 위해 더 큰 비용을 치를 수 있는 셈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2020년 10월 네덜란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 조기 출하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1월 구속 수감되면서 삼성전자가 EUV 장비 확보 속도전에 뒤쳐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인텔이 파운드리에만 집중한다는 가정 하에, 국내 반도체 산업에도 장기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삼성이 신규 투자와 관련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은 없지만, 산업 주도권 확보 측면에서 총수 부재가 악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