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품귀와 함께 미중 패권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미국과 중국이 자국 중심 투자를 노골화 하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총수 부재 여파로 중요한 의사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다.

20일 재계에 따르면, 1월 국정농단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구치소에 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면론’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반도체 생산라인 재편 및 확대를 위해선 이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재용(가운데)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1월 9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이재용(가운데)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1월 9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앞서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16일 홍 부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동석한 경제단체장들과 함께 이 부회장의 사면을 건의했다. 홍남기 총리 직무대행 겸 경제부총리는 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재계의 이 부회장 사면 건의와 관련해 "관계기관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최근 미 백악관 회의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의 반도체 기업을 초대해 노골적 투자 압박을 가했다. 삼성전자는 어떤 식으로든 화답해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

실제 백악관 회의 직후 인텔과 TSMC는 즉각적인 조치로 미국 요구에 화답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백악관 회의 당일인 12일에 "6~9개월 이내 차량용 반도체를 만들어 미국 자동차 회사에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마크 리우 TSMC 회장도 미국 내 변함없는 투자 의사를 재확인하며 걸맞은 인센티브를 요청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2020년부터 텍사스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 증설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신중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이번 바이든 대통령의 메시지로 미국 내 파운드리 공장 증설 계획을 이르면 5월 중 발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재계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에 맞춰 삼성전자의 미 투자계획이 공개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본다. 이 부회장 구속으로 늦어진 경기도 평택캠퍼스 P3 라인 신규 투자계획도 하반기에는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공장에 대한 투자 규모는 50조~70조원쯤으로 추산된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의 투자 발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는 일정에 맞춰 나올 가능성이 높다"며 "이 경우 미국으로 가는 우리 정부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물론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재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2009년 이뤄진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한 특별사면도 비교 대상으로 거론된다.

당시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이 회장이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명분으로 특별사면을 시행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이 처한 상황을 보면 2009년 당시보다 더욱 급박한 상황이라는 지적이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하지만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이 부회장의 가석방이나 사면 문제는 실무적으로 대통령이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은 이상 검토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재계 일각에서도 현실적으로 이 부회장의 사면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앞서 문 대통령이 뇌물, 알선수재, 알선수뢰, 배임, 횡령 등 5대 중대범죄 사범에 대해서는 사면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가석방·형집행정지 등 인신 구속 상태를 벗어날 방법도 거론된다. 관련 법률에 따르면 유기형은 형기의 3분의 1이 지난 후 행정처분으로 가석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법무부 산하 가석방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하려면 70~80%쯤 형기를 채워야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부회장은 향후 6개월 이상의 형기를 더 채워야 해 8·15 광복절 특별사면은 물론 가석방 대상에 포함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이 부회장의 만기 출소가 2022년 7월인 만큼 삼성이 무리하게 사면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1년 3개월쯤 더 복역하면 출소할 수 있는데 굳이 사면으로 논란의 중심에 설 이유가 없다는 시각이다.

삼성 측은 민감한 사안인 만큼 사실상 공식 입장이 없다는 신중한 반응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사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고 관여할 수도 없다"며 "(분위기가) 어떻게 바뀔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