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암호화폐, 속칭 ‘코인’판에 대한 투자 열기는 거의 광기가 느껴질 정도다. 투자라기 보다 투기에 가깝고, 그만큼 위험성에 대한 경고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개인 투자자는 물론 글로벌 규모의 기업까지 코인판에 뛰어들 정도다.

관망만 하던 정부도 뒤늦게야 암호화폐 시장에 제동을 걸고 있다. 특별단속을 통해 암호화폐 거래소가 공정하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고, 불법거래나 이상거래를 잡아냄으로써 암호화폐를 통한 자금세탁, 사기 등 불법 행위 등을 잡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뒷북 정책에 업계와 투자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때늦은 정부의 대책 발표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책이 빠진 원론적인 수준에 그친 데다, 대대적인 개입 선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움직임은 여전히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코인 투자 광풍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늦어지는 사이, 국내 조립 PC 시장은 사실상 고사 위기다. 조립 PC 시장에 공급되어야 할 재화와 시장 내에서 돌아야 할 자금이 엉뚱하게 암호화폐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면서 시장 거래가 말라붙고 있기 때문이다.

암호화폐의 ‘채굴’을 위한 그래픽카드 수요 폭등과 그로 인한 품귀 현상이 시작이었다. 소비자들이 조립PC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성능’이다. 그 성능을 위한 핵심 부품인 그래픽카드의 씨가 마르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중소기업이 거의 대부분인 조립PC 시장은 지난 수 개월 동안 개점휴업이나 다름 없는 상태를 유지해왔다.

예전 ‘코인 열풍’때는 암호화폐 가치에 대한 거품이 일찍 빠지면서 스스로 브레이크가 걸렸고, 엉뚱한 데로 빠지던 재화와 자금이 다시 돌아오면서 조립PC 업계도 원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스스로 거품이 꺼지기는 커녕, 암화화폐 시장이 브레이크 풀린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리면서 전혀 관계가 없던 것처럼 보이던 요소까지 암호화폐 시장에 끌려가는 모양새다.

이를 시사하는 것이 최근 중국을 중심으로 불거지고 있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품귀현상이다. 세계에서 암호화폐 채굴 산업 규모가 가장 큰 중국에서 HDD까지 채굴용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벌써부터 고용량 HDD를 중심으로 수요가 폭증하면서 품귀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부정적인 내용이다.

이것은 코인 광풍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HDD는 물론 PC의 다른 구성 요소들까지 코인 채굴 시장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중국 내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언제 그 불길이 국내에도 번질지 모른다. 규모는 몰라도, ‘코인’에 대한 열기 만큼은 국내도 중국 못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PC 시장에서 살아남는 곳은 풍부한 자금 동원력과 막대한 바잉 파워로 각종 악재 속에서도 부품을 충분히 수급할 수 있는 대기업 뿐인 상태다. ‘돈이 벌리는 곳으로 재화가 흘러들어간다’는 자본 논리에 따라 PC의 구성 요소들과, 시장을 유지하는 자금이 하나 둘 암호화폐 시장에 빼앗기면 중소기업이 대부분인 조립PC 시장은 말 그대로 말라붙을 수 밖에 없다. 이미 대기업 브랜드의 완제품 PC가 조립PC보다 더 싼 가격 역전 현상이 일어난지 오래다.

정부는 적극적으로 국내 암호화폐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단순히 금융시장의 혼란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가 그렇게도 챙기고 싶고, 살리기를 원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몰린 시장 중 한곳이 바로 조립PC 시장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성공적으로 암호화폐 시장에 제동을 걸 수 있다면, 적어도 국내에서만큼은 조립PC 시장이 말라가는 것을 조금이나마 억제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의 중소기업·소상공인 살리기인 셈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