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래픽카드 대란'과 쇼핑몰의 무책임

최용석 기자
입력 2021.05.11 06:00
암호화폐 채굴 대란으로 그래픽카드 가격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상승세는 어느덧 출시 가격의 3배까지 넘어설 모양새다. 어떻게든 제품을 구매하면 하나당 최대 수십만 원의 차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수요자가 아닌 엉뚱한 이들마저 그래픽카드 구매에 혈안이다.

그런 가운데 한 수입유통사가 어떻게든 실수요자들이 그래픽카드를 정가에 구매할 수 있도록 나서 주목을 받았다. 그래픽카드 대란이 시작된 연초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지포스 RTX 3070, 3080, 3090의 FE 제품을 초기 출시한 정가 그대로 판매하고 있었던 것. 그것도 모델별로 20~30장씩 소량만 찔끔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별로 통 크게 100장에서 200장씩 대량으로 풀었다. 시세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물량도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공급하니 그래픽카드가 필요한 소비자 입장에선 그야말로 가뭄 속 단비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모처럼의 정가 판매에 채굴업자는 물론, 전문 리셀러를 비롯한 투기 세력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00~200개에 달하는 물량이 판매 시작과 거의 동시에 매진되어 버리는 상황이 속출했다. 제품 선택에서 구매 과정, 결제까지 자동으로 1초 이내에 끝낼 수 있는 소위 ‘매크로’가 동원됐기 때문이다.

해당 수입유통사도 이를 막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 구매 페이지에 직접 커서 조작이나 터치 조작이 필요한 풀다운 메뉴를 단계별로 배치해 자동 매크로 사용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큰 효과가 없자, 아예 사람이 아니면 풀 수 없는 주관식 문제를 넣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실제로, 주관식 문제를 도입한 지난 4월 말 판매에서는 이전과 달리 상대적으로 여유 있게 구매했다는 성공담이 꽤 많이 올라왔다. 주관식 문제가 매크로 퇴치에 효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특히 이번 4월 판매 물량에는 중국 커뮤니티에 국내 쇼핑몰 링크가 공유되면서 중국인들의 매크로 구매가 더욱 우려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유통사의 노력이 쇼핑몰 측의 조치로 모두 허사가 됐다. 4월 판매 종료 후 올라온 잔여분 판매 공지에서 돌연 주관식 문제가 없어졌다. ‘왜 주관식 문제가 없어졌냐’는 소비자들의 문의에, 유통사 측은 일부 소비자(?)가 쇼핑몰 측에 직접 항의해서 더는 주관식 문제를 넣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쇼핑몰 측이 전후 사정을 파악하지 않고 일부 소수 소비자의 ‘민원’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다수의 소비자가 호평하고 지지하던 구매 방법을 일방적으로 막아버린 것이다. 입점업체로서 상대적으로 ‘을’의 입장인 유통사 입장에선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해당 그래픽카드가 등록된 쇼핑몰에 올라온 소비자와 유통사의 질문답변 일부 / 커뮤니티 갈무리
결국 주관식 문제가 사라진 잔여분 판매 물량은 역시나 판매 개시 1초도 안 돼 모두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사의 블로그와 커뮤니티의 관련 게시물에는 수많은 ‘구매 대기자’들의 성난 댓글이 꾸준히 달리는 중이다.

그래픽카드 구매와 관련해 쇼핑몰들의 매크로 허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채굴 대란 이전인 지난해 말, 지포스 RTX 30시리즈 그래픽카드가 막 출시된 당시 수요가 공급을 아득히 초과해 구매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도 여러 쇼핑몰에서 매크로를 이용한 싹쓸이 정황이 수시로 포착됐다. 그러나 어떠한 쇼핑몰에서도 매크로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곳이 없다. 결국 수입유통사들이 별도 판로를 통한 직접 판매, 추첨식 판매 등 스스로 자구책을 궁리해야 했다.

즉, 쇼핑몰 입장에서는 직접 하나하나 메뉴 버튼을 눌러가며 구매하는 일반 소비자가 구매한 건이든, 자동으로 1초도 안 되어 제품을 쓸어가 버리는 매크로를 이용한 구매 건이든, 쇼핑몰 운영에 지장이 없고 매출만 올릴 수 있다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인 셈이다. 그 와중에 실제 소비자들의 요청과 유통사 측의 자구책은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

정말로 소비자를 생각하는 쇼핑몰이라면 ‘민원’ 해결에 급급하기보다 어째서 해당 업체가 그러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전후 사정을 조금이라도 파악해 보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자신들의 행정 편의, 업무 편의만 고려하고 입점업체의 자구책과 다수 소비자의 요청을 무시하는 쇼핑몰은 실제로는 소비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잇속만 챙기려는 그저 그런 ‘장사꾼’일 뿐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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