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미국에 20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신규 투자를 단행한다. 바이든 미 행정부의 적극적인 손짓에 화답한 것으로,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세계 1위 대만 TSMC를 추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도체 업계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한미정상회담 일정에 등떠밀려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급망 강화에 적극적인 미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투자를 확정한 것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수십조원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철저히 계산된 움직임이라는 얘기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근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에서 "미국에 170억달러(19조1675억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공장을 구축할 계획이다"며 "조만간 구체적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굳건한 한·미 동맹을 통해 양국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미 기업과 동반성장하는 등 혁신의 활로를 찾겠다"고 덧붙였다.

170억달러는 삼성전자의 역대 최대 규모 해외 단일 투자액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 중국 시안에 낸드플래시 메모리 공장을 짓는데 108억달러(12조1770억원)를 투자한 적이 있다.

반도체 업계는 삼성이 미국에 5나노미터(㎚) 중심의 첨단 공정을 구축할 것으로 전망한다. 기존 미 오스틴 공장은 14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주력으로 한다. 국내 평택 P2 라인이 올해 양산에 돌입하고 P3 라인이 2022년 완공되면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파운드리 공급망이 갖춰질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전자가 투자를 공식화 한 만큼 TSMC와 파운드리 수주 경쟁의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애플·구글·퀄컴·엔비디아·AMD 등 미국 소재 대형 고객사의 수주 물량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TSMC의 투자 행보는 삼성 이상으로 매섭다. 최대 360억달러(41조원)쯤을 투입해 미 애리조나주에 5㎚ 파운드리 공장 6곳 건설을 검토 중이다. 한발 더 나아가 미국에 3㎚ 반도체 공장을 짓는 방안까지 검토한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애플·MS 등 최대 고객을 경쟁사에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는 삼성전자와 비교해 공정·수주 능력 모두 앞서는 만큼, 삼성의 미 투자는 기회로 볼 수 있지만 잠재적 리스크 일수도 있다"며 "파운드리 호황이 지속되고 있어 시장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삼성이 피할 수 없는 경쟁을 맞이한 셈이다"라고 설명했다.

애초 미 반도체 공급망 확보를 위한 국가간 협력에 삼성전자가 몸을 실은 만큼 안정적 수요처 확보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란 긍정적 시각도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TSMC의 대만 내 공장을 단일 공급망으로 의존하기에 부담이 있다. 중국의 무력 시위 리스크 때문이다. 최근 글로벌 정세를 감안하면 TSMC와 삼성전자의 미국 내 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급망 강화를 위해 TSMC뿐 아니라 삼성전자의 현지 파운드리 수주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 정부도 측면 지원에 나섰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1일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과 별도 면담을 갖고 "기업 투자에 수반되는 리스크를 정부가 분담하는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미 정부가 세제, 인프라 등 투자 인센티브를 적극 지원해 달라"고 당부했다.

삼성전자의 미국 내 두 번째 파운드리 공장 부지로는 텍사스주(오스틴)를 비롯해 뉴욕(버팔로), 애리조나(피닉스)주가 거론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어느 지역에 공장을 건립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며 "지방정부와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를 두고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0년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가 54%로 압도적 1위다. 2위인 삼성전자는 17%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TSMC에 뒤졌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