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특수 악용한 조립PC, 신뢰 회복해야

최용석 기자
입력 2021.06.29 06:00
최근 암호화폐 시장이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채굴업계의 그래픽카드 수요가 뚝 끊겼다. 최대 수요처(?)가 사라지면서 말도 안 되게 치솟았던 그래픽카드 가격도 내림세로 돌아섰다. 슬슬 제품을 쌓아놓고 판매할 정도로 물량에도 여유가 생긴 모양새다. 여전히 비싸지만,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던 이전에 비하면 상황이 훨씬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지난 반년에 걸친 그래픽카드 대란 사태가 조립PC 업계를 보는 소비자들의 시선을 바꾸어놓았다. 어지간해선 업계의 말과 주장을 믿지 않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깊은 불신(不信)의 골이다. 그래픽카드 대란으로 인한 일련의 사태에서 조립PC 업계가 소비자들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채굴업자들이 웃돈을 주고서라도 그래픽카드를 쓸어 담기 시작하자 ‘시가’를 들먹이며 그래픽카드 가격을 가장 먼저 올려버린 것이 바로 조립PC 업계였다. 가격 책정의 기준을 일반 소비자의 수요가 아닌, 채굴업자들의 매입 수요 기준으로 바꿔버린 것. 결국 PC와 그래픽카드가 필요했던 대다수 일반 수요자들은 치솟는 가격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부 유통사들이 특가판매, 추첨 판매 등을 진행하며 뿔난 소비자 달래기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에 소량씩 찔끔찔끔 진행하는 이런 ‘특판행사’에 채굴업자, 리셀러까지 너도나도 끼어들고, 편법 거래나 매크로 등이 활개를 치면서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의 분노만 더 키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다른 상품을 함께 구매해야만 그래픽카드를 적정 가격에 살 수 있는 ‘끼워팔기’ 역시 소비자들의 분노를 키우는 데 한몫했다. 그래픽카드 때문에 원하지 않는 메인보드나 모니터를 함께 사야 한다면 오히려 불필요한 지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라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채굴수요 감소로 그래픽카드 가격이 하락세로 돌아선 현재, 소비자들이 조립PC 업계에 느끼는 실망감은 더욱 커진 상태다. 처음부터 채굴 성능이 제한되어 시장 전체의 가격 하락을 유도할 것으로 기대됐던 ‘LHR(라이트 해시 레이트)’ 그래픽카드는 막상 시중에 풀리면서 채굴 제한이 없는 기존 제품과 비슷한 가격대로 팔리는 중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들 기준의 ‘시가’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채굴수요가 사라진 이후, 그렇게 부족하던 그래픽카드 물량이 지하 수맥이라도 터진 듯 여기저기서 펑펑 솟아나고 있다. 미리 어딘가에 쟁여둔 물량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가격은 비싼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를 보는 소비자들의 시선은 더더욱 고울 리가 없다.

일각에서는 아무리 봐도 중고로밖에 안 보이는 그래픽카드 제품이 ‘신상품’으로 팔린 사례가 보고되면서 채굴용으로 쓰던 중고 그래픽카드를 다시 포장해 새제품으로 판매하는 것 아니냐는 ‘재포장 의혹’이 업계를 강타하기도 했다.

지난 반년 동안 업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안 좋은 사례들을 실시간으로 쭉 지켜본 소비자들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진다 한들 PC 업계의 말과 그들의 행보를 순순히 믿을 수 있을까? 정당한 소비자로서 대우받지 못하고 소외된 분노와, 그에 기반을 둔 뿌리 깊은 의심은 이제 그들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못 믿을 정도다.

최근 커뮤니티를 달구는 ‘AS 차별 논란’에 그러한 소비자들의 쌓인 분노와 불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무상 AS기간이 남아있는 그래픽카드가 외부 오염이 상당히 심하고, 기판 쇼트(단락)가 의심된다는 이유로 국내 처리가 아닌, 최장 3개월까지 걸리는 공장 RMA(Return Merchandise Authorization)로 처리하기로 했다는 것이 골자다.

RMA는 무상 AS기간이 끝난 제품이거나, 무상AS 기간 중에도 ‘명백한 소비자 과실’로 파손된 제품에 한해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외관 상태가 안 좋고, 그로 인해 파손이 ‘의심’된다는 다는 이유로 대뜸 RMA를 제안했다는 것은, 유통사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제품 사용자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냐는 또 다른 ‘의심’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해당 유통사가 해명문을 올렸음에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그럴 거면 그냥 훨씬 저렴한 해외 직구로 사버리고 직접 RMA 처리하지, 왜 비싼 돈을 더 내고 국내 업체 통해 사야 하나?"라는 말이 소비자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심지어, 해명 글과 그에 첨부된 제품 사진도 처음 서비스를 의뢰한 당사자 동의 없이 올린 것으로 드러나면서 ‘여전히 소비자 보호는 뒷전’이라는 의식을 무심결에 드러냈다.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양길에 접어들던 PC는 업무용 기기와 게임을 비롯한 여가용 기기로 다시금 재조명을 받는 중이다. 시장조사기관들도 당분간 PC 시장의 성장세가 지속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국내 조립PC 업계가 겉으로는 소비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소비자 챙기기는 뒷전인 모습만 계속 보인다면, 남는 것은 차디찬 냉대와 불매, 무관심과 그로 인한 자멸뿐이다. 이미 그래픽카드 대란이 장기화하면서 적지 않은 소비자들이 ‘노트북’이나 ‘게임 콘솔’ 같은 다른 대안을 선택했다. 업계 스스로 자신들의 시장 파이 규모를 줄인 셈이다.

조립PC 업계가 앞으로 시장에서 살아남고, 사업을 계속하고 싶다면 늦기 전에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것도 업체 한두 곳만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 도맷금으로 취급받는 업계 전체가 뼈를 깎는 각오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국내 조립PC 업계의 미래는 그리 길지 못할 것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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