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가상자산거래소들이 발만 구르고 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가상자산 사업자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암시하는 발언을 내놓으며 은행들이 몸을 사리면서다. 가상자산 사업자에 자금세탁방지의무(AML)를 부과하는 특정금융법(이하 특금법) 시행 유예기간을 두 달 반 가량 남겨둔 가운데 실명계좌를 받지 못한 거래소는 원화마켓을 닫거나 영업을 중단해야한다. 이에 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정부가 거래소의 기획 해킹이나 먹튀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8일 가상자산 업계에 따르면 시중 은행들이 은성수 위원장의 눈치를 보며 실명계좌 발급 논의를 중단하거나 발급을 꺼리고 있다. 최근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업비트와 빗썸, 코인원, 코빗 등 4개 거래소를 제외하고 실명계좌 발급이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잇따라 내놨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시중 은행 관계자는 "은성수 위원장이 실명계좌 추가 발급에 대해 계속 부정적인 발언을 하고 자금세탁방지위험을 강조하면 은행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며 "정부의 기조가 은행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고 말했다 .

이로 인해 중소 거래소는 생존을 크게 위협받는 상황이다. 금융위원회가 컨설팅을 신청한 거래소를 방문하는 가운데, 일부 사업자들은 실명계좌를 받기 위해 은행 실사를 준비하고 있지만 은행들이 실명계좌를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는 9월 24일까지 실명계좌를 받지 못하면 거래소는 원화마켓을 닫거나 영업을 중단해야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대다수 사업자들이 사업을 포기하며 시스템 구축 시늉만 내는 가운데, 자칫 매몰 비용이 될지 모르는 자금을 꾸준히 투자하는 곳에 주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 거래소는 사업을 계속할 목적을 가지고 준법시스템을 강화하고 있어 실명계좌를 받지 않을 경우 폐업으로 인한 리스크가 클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약 100여곳에 달하는 거래소 중 실효성있는 자금세탁방지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곳은 10곳 정도로 추려진다.

가상자산 추적 솔루션 업체인 웁살라 시큐리티의 구민우 한국지사장은 "대부분 사업자는 ISMS를 신청해놓고 라이트 버전만 구매하는 등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금세탁방지 솔루션만 구축하려한다"면서도 "실제 금융권 수준의 솔루션을 구축하고 인력을 확보했지만 보수적인 분위기로 사업을 장담할 수 없는 곳들이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선투자로 건전한 거래 환경을 만드는 곳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직 실명계좌를 받지 못한 고팍스는 오직 보안과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구축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플랜B’는 없다. 올해 대규모 인력채용을 시작으로 최근 90명까지 직원을 늘린 고팍스는 투명성과 건전성으로 직원을 설득해가고 있다. 고팍스 관계자는 "채용 과정에서 직접 경영진을 만나고 사업 방향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하고 성장가능성을 믿는 분들이 합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어닥스는 자사 플랫폼에 상장된 가상자산을 10여개로 유지하면서 규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있다. 지난해 준법감시팀을 만들고 올해 10명까지 인력을 늘리는 한편 자금세탁방지 기업인 옥타솔루션을 통해 시스템을 구축했다. 코어닥스 관계자는 "회원가입 절차에 고객알기제도(KYC)를 도입하고 이상거래를 탐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며 실명계좌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오비코리아는 거래소들이 원화마켓을 닫고 비트코인(BTC) 마켓 등만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사업을 축소할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후오비코리아 관계자는 "원화마켓을 닫으면 사업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며 "현재 실명계좌를 발급받기 위해 열심히 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가상자산 거래소에 맞는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이 하루 빨리 공개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업계 또 다른 전문가는 "불명확한 기준을 세워놓고 특별한 이유와 근거없이 계좌를 발급하지 않으면 자금세탁방지구축 투자금을 회수할 길이 없어진다"며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이어지면 정부가 거래소의 기획해킹이나 먹튀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라고 일침을 놨다.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