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꾀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각국이 국운을 걸고 펼치는 적자생존 전략의 결말에 관심이 쏠린다. 한국, 대만, 일본 등은 사실상 미국과 전략적 동맹을 체결한 반면 중국은 미국과 패권전쟁에서 밀리지 않으려 반도체 굴기를 지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미중 무역 갈등으로 표면화됐듯이 반도체는 단순 상품이 아닌 국가의 생존 필수품이자 포기할 수 없는 안보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반도체 칩 없인 시민의 일상생활이나 공공인프라, 서비스, 첨단 제품 생산, 무기시스템의 운용이 불가능하다.

반도체 생산력의 72%는 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미국의 생산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필요로 하는 반도체를 자국 중심으로 생산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세계 메모리와 파운드리 각각 1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대만 TSMC를 5월 백악관 회의에 부른 것도 여기에 동참하라는 압박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조선일보 DB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조선일보 DB
23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세계시장 절반을 석권한 대만의 TSMC는 일찌감치 향후 3년간 1000억달러(114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어 바이든 미 대통령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발 빠르게 올라타 미 애리조나주에 360억달러를 들여 6개 생산라인을 증설하기로 했다.

TSMC는 대만·미국뿐 아니라 반도체가 절실히 필요한 각국에 투자를 추진하며 반도체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7월 말 마크 류 TSMC 회장은 주주들에게 "독일 내 새로운 반도체 제조 공장 설립을 검토하는 초기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독일은 TSMC 주요 고객사인 폭스바겐, 다임러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부활을 경제 안보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 일본은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2021년 통상백서'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주요 물자 확보를 위해 생산거점을 다양화하고,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과의 신뢰를 축으로 공급망을 새로 재편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4월 미국과 정상회담 이후 반도체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는 중이다. 미·일 양국은 디지털 분야 경쟁력을 강화하고 5G 등 차세대 모바일 네트워크 분야 ICT(정보통신기술) 협력을 위해 45억달러(5조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TSMC를 끌어들여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나섰다. 일본 경제성은 6월 TSMC에 190억엔(2000억원)의 보조금 지원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는 TSMC가 도쿄의 동쪽에 위치한 이바라키현에 짓겠다는 연구개발(R&D) 시설에도 국고를 지원하기로 했다. TSMC는 추가로 일본 큐슈 중부 구마모토현에 12인치(300㎜) 웨이퍼 반도체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SMIC 사옥 / SMIC
SMIC 사옥 / SMIC
자국 중심 공급망을 구축하는 미국에 대항해 반도체 자립에 나서려던 중국의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는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 ‘칭화유니그룹(淸華紫光)’은 최근 20조원이 넘는 대규모 부채를 이겨내지 못하고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15년 ‘중국 제조 2025’ 전략을 발표하며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 2025년 7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2020년 기준 15.9%에 그쳐 사실상 물거품이 된 분위기다.

그럼에도 중국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리커창 중국 총리는 3월 중국의 연례 최대 정치행사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AI를 포함한 8개 신산업과 7개 영역의 연구·개발(R&D) 지출을 매년 7% 이상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중국은 28㎚ 반도체 양산에 성공한 SMIC를 중심으로 2022년에 14㎚ 칩 대량 생산에 나설 계획이다. 중국이 14㎚ 이상 반도체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 반도체가 글로벌 수요의 95%를 차지하고 있어서다. 14㎚ 이상 반도체는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스마트폰용 AP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구동칩(DDI), 이미지센서(CIS), 전력반도체(PMIC), 자동차용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등에 모두 쓰인다.

중국은 이를 위해 반도체 장비도 대거 사들이며 생산 기반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고 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액이 187억달러(21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 대비 39% 증가한 규모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한국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쌍끌이 중이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공격적인 증설 투자를 바탕으로 1위 기업 TSMC를 맹추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총 171조원을 투자해 파운드리를 포함한 비메모리 부문에서 글로벌 1위가 되겠다는 목표를 뒀다. 그 일환으로 미국에 170억달러(19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신규 공장 증설을 추진 중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가석방에 따른 경영 복귀 가능성이 열리면서 삼성전자의 투자 시계도 빨라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5월 2030년까지 국내에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급망인 ‘K-반도체 벨트’ 구축으로 국내에 세계 최대·최첨단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반도체 제조부터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첨단장비, 팹리스(설계) 등을 아우르는 반도체 제조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기업이 10년간 510조원 이상을 투자하며, 정부는 민간투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액공제 확대·금융지원·인프라 등을 패키지로 지원한다.

SK하이닉스는 이같은 방침에 동참하기 위해 기존 파운드리 생산능력을 두배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SK하이닉스가 지난해 2000억원을 투자한 ‘키파운드리’를 완전 인수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회사 측도 증설 방안 중 하나로 검토하고 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