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시작한 암호화폐 광풍으로 인한 그래픽카드 대란이 시작된지 1년여의 시간 동안, 국내 PC 유통 시장에 수십 년간 쌓여왔던 온갖 치부와 병폐가 수면 위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 대상은 위로는 중견업체 수준인 총판 단위 업체부터, 작게는 중소규모 소매 업체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는다. 소비자들에게 양질의 제품을 좋은 가격과 서비스로 제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윤을 남길 수 있다면 어떠한 꼼수라도 쓰겠다는 모양새다.

PC 유통 업계의 소비자를 우롱하는 수법은 날이 갈수록 기발(?)하고 황당해지고 있다. 공급이 안정화된 상태에선 그래픽카드 물량을 쌓아두다가 본격적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면 재빨리 가격표를 바꿔달고 비싼 가격에 판매하는 행태는 이제 일상이다. 이런 모습은 예전에도 있었던 만큼 새로운 병폐도 아니다.

분명히 어디선가 사용했던 흔적이 역력한 상품을 새 박스로 포장해 판매하는 ‘재포장 판매’, 소비자가 공시된 가격에 구매하고 결제까지 마쳤는데 그 사이 가격이 오르자 제품 발송을 거부하는 ‘판매 거부’, 이미 발송한 제품을 택배사에 연락해 소비자가 수령하기 전에 다시 회수하고 거래를 취소하는 ‘가로채기’ 등 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기법(?)들이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중고나라, 당근마켓 등 중고 물품 거래가 활발한 개인간 거래 플랫폼, PC 하드웨어 커뮤니티의 회원간 장터 등에서 ‘미개봉 상품’이란 타이틀을 달고 판매하는 그래픽카드는 소수의 되팔이(리셀러) 외에는 모두 PC 유통 관계자가 개인자격으로 올린 매물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아예 대놓고 전문 유통업자임을 드러내고 개인간 거래 플랫폼에서 ‘미개봉 중고’를 판매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정상적인 유통 경로가 아닌 ‘개인간’ 거래 취급이다 보니, 필수로 발급해야 하는 현금영수증도 어물쩡 넘기고 과거처럼 수기 영수증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흔하다.

최근에는 소비자의 정당한 반품 권리까지 무시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내용은 이렇다. 한 소비자가 원하는 그래픽카드를 260여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매했는데, 제품 수령 후 다른 판매처에서 같은 제품을 더 싼 가격에 판매하는 곳을 발견했다. 결국 구매자는 사용은 커녕 아직 개봉도 안한 그래픽카드를 쇼핑몰을 통해 반품을 신청했는데, 판매점에서 반품 접수를 거부한 사례다.

개봉도 안한 만큼 상품 가치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단순 변심에 의한 반품인 만큼 구매자가 직접 반품 비용을 내겠다는데도 판매처는 계속 반품 접수를 거부했다. 심지어는 반품 신청이 들어오자, 당초 공지된 변심 반품 비용인 1만원을 10만원으로 올려버리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보였다. 구매자가 미리 해당 공지 내용을 캡처해 증거자료로 확보해둬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모든 책임을 구매자가 덮어쓸 뻔했다.

결국 구매자는 제품의 정상적인 환불을 위해 쇼핑몰에 민원을 신청하고, 소비자보호원에도 피해 내용을 접수했다. 그리고 관련 내용을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소비자들과 공유했다. 그러자 판매자는 구매자에게 전화를 통해 욕설과 더불어 영업 방애 행위로 신고하겠으며, 직접 집까지 찾아가겠다는 협박성 멘트까지 날린 것으로 알려졌다.

PC 유통 시장에는 소규모 영세 업체가 많고, 260여만원의 환불 금액이 해당 판매자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금액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재화의 가치가 다시 판매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지 않는 한,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에 주문을 취소하거나 반품할 수 있는 것은 법으로 보장된 소비자의 권리다. 즉, 문제의 판매자는 법까지 무시하면서 땡깡을 다 부리는 모양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아무리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고, PC 유통의 중심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었지만 소비자들을 만만한 호구로 보는 PC 관련 유통 업자들의 마인드 자체는 10년 전, 2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증명하는 꼴이다. 이제는 빅데이터까지 동원하는 첨단 전자상거래 시대에, PC 유통 시장은 여전히 수십년 전의 낙후된 모양 그대로다.

소비자들은 하루 빨리 PC 유통 시장에도 대기업들이 진출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이유다. 제품 가격이 오르더라도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제품을 구매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소비자 등쳐먹기로 이골이난 중고차 시장에서 대기업의 진출을 허용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무리 소상공인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하지만, 소비자를 우롱하고 등쳐먹으려만 하는 유통 시장은 정상이 아니다. 일부 소수의 악질 판매상만 그러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기존에 문제를 일으키던 업체 뿐 아니라 매번 새로운 업체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정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난해, 지포스 30시리즈가 국내 출시됐을 때 모 유명 브랜드가 그래픽카드 초도 물량을 쿠팡을 통해 단독으로 공급함으로써 시장 전체의 가격이 안정화되는 기적(?)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바 있다. 대기업 유통으로 인한 순기능을 소비자들이 직접 확인한 순간이었다.

국내외 대형 유통 채널이 PC 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스스로 보호받을 명분을 팽개친 비양심적인 업자들보다, 약자인 소비자들을 보호하는 게 더 시급하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