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내놓은 신개념 조리 기기 ‘비스포크 큐커’가 7월 말 출시 이후 10월 말까지 2만대가 넘게 팔렸다. 독특한 TV 광고와 라이브커머스 등 마케팅 전략에 힘입어 ‘중박’ 이상의 성적표를 내놓은 셈이다. 이 때문에 가전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큐커의 선전에 힘입어 15년 전의 흑역사를 설욕하는 것은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삼성전자 모델이 비스포크 큐커 전용 밀키트와 간편식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 삼성전자
삼성전자 모델이 비스포크 큐커 전용 밀키트와 간편식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 삼성전자
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그릴, 에어프라이어, 전자레인지, 토스터 등 4가지 기능을 갖춘 비스포크 큐커는 신혼부부 등의 디자인을 선호하는 고객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제품은 삼성전자의 오픈 협업 시스템인 ‘팀 비스포크’에 식품업계를 끌어들인 것도 눈길을 끈다. 식품업체의 식료품을 매달 일정액 이상 구매키로 약정하면 비스포크 큐커를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이들 업체의 식품 바코드를 읽어 자동으로 조리해 주는 기능도 있다.


2006년 첫선 삼성 ‘스마트 오븐’ 흥행 참패…생활가전사업 축소·재편

사실 비스포크 큐커는 ‘신개념’ 조리 기기는 아니다. 이미 삼성전자가 15년 전인 2006년 선보였다가 실패했던 비즈니스 모델이다. 당시에도 CJ 등 식품 대기업과 손잡고 식품 포장지의 바코드를 오븐에 인식시키면 자동으로 조리하는 기능을 내세웠다. 협력한 식품업체들은 바코드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식품을 별도로 내놨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2년 넘게 공을 들인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바코드를 읽는 스마트 오븐을 받아들이기엔 시장이 무르익지 않았다. 대대적인 마케팅을 했지만 당시 생활가전총괄은 영업손실이 전년도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났다.

만성 적자 늪에 허덕인 생활가전사업은 2007년 초 조직개편에서 ‘총괄’ 사업부문에서 ‘사업부’로 축소·재편됐다. (스마트) 오븐을 포기하고 냉장고·세탁기·에어컨 등 3대 주력상품에 집중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2007년 3월 광주사업장을 찾은 자리에서 "(생활가전사업은) 한국에서 할 만한 사업이 아니다"라고까지 평하기도 했다.

삼성전자가 2007년 출시한 하우젠 스마트 오븐 / 삼성전자
삼성전자가 2007년 출시한 하우젠 스마트 오븐 / 삼성전자
비스포크 앞세워 식품사와 15년 만에 동행…이번에는

삼성전자는 당시의 비싼 수업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15년 만에 ‘흑역사’ 지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올 4월 ‘비스포크 직화오븐 AI’가 시작이다. 비스포크 직화오븐 AI는 간편식을 최적으로 조리하고 싶은 소비자를 위한 ‘스캔쿡’ 기능을 제공했다. 15년 전 스마트 오븐의 바코드 조리 기능을 재현한 것이다. CJ와 15년 만에 다시 손을 잡았다.

삼성전자는 7월 말 비스포크 큐커를 내놓으며 식품업체와의 협업을 더욱 강화했다. 간편식 정기 쇼핑 구매 약정 서비스인 ‘마이 큐커 플랜’을 통해 이용 가능한 식품사를 11곳(프레시지, 마이셰프, 청정원, 풀무원, 동원, 오뚜기, 앙트레, hy, 테이스티나인, 캐비아, 푸드나무)으로 확대했다. 스캔쿡이 가능한 메뉴도 총 140종 이상으로 늘렸다. 삼성전자와 식품업체들은 비스포크 큐커에 최적화된 전용 레시피를 공동 개발해 11월 말부터 순차 도입할 예정이다.

그러나 타사의 비슷한 조리 기기보다 비싸다는 지적도 있다. 비스포크 큐커의 출고가는 59만원으로 타사 비슷한 기능을 보유한 제품보다 2배가량 비싸다. 중국기업에 위탁생산(OEM)을 맡겨 원가를 낮춘 것이 수익성 확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측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조리 기기 자체의 성능보다는 ‘멀티쿡(동시 조리)’과 식품업체 제휴라는 마케팅 포인트가 출시 초기 고객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식품 구매 약정 없이 60만원에 가까운 출고가에 대한 소비자의 저항은 아직까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삼성전자는 MZ세대를 타깃으로 비스포크 큐커의 온라인 마케팅을 지속할 방침이다. 식품업체와 협업하는 신개념 조리 기기로서 인덕션과 같은 하나의 큰 카테고리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기존 전자레인지나 직화오븐 대비 신규 매출을 이끄는 비스포크 큐커의 성장에 힘을 싣고 있다"며 "과거 바코드 기반 자동 조리 서비스가 비스포크 큐커를 만나 진화에 성공한 셈이다"라고 강조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