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도체 시장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형국이다. 반도체 공급망 패권을 둘러싸고 ‘고래’인 미국과 중국이 다투는 사이, ‘새우’ 격인 한국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미국 정부는 자국 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을 강력하게 통제하는데, 중국을 핵심 공급망으로 삼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역시 영향을 받는다.

16일 외신과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인텔은 반도체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최근 중국 청두 공장에서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 생산 증가를 노린다. 하지만 국가안보를 내세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로부터 제동이 걸렸다. 중국에서의 생산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탓이다. 인텔은 부랴부랴 중국에서의 생산량 증가 계획을 포기하며 대안을 모색 중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 18일 중국 시안 삼성 반도체 공장을 찾아 시설을 점검하는 모습 /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 18일 중국 시안 삼성 반도체 공장을 찾아 시설을 점검하는 모습 / 삼성전자
미정부는 반도체 공급망을 국가 안보 이슈로 해석한다. 미 상무부는 인텔, 삼성전자, 대만 TSMC 등 반도체 기업에 재고, 주문, 판매 등 공급망 정보를 묻는 설문 관련 답변을 8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었다. 사실상 중국 생산·수출 물량 등을 미정부 차원에서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중국 관영 언론은 미국이 반도체 위기를 명분으로 기업의 기밀 데이터를 강탈했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정부의 중국 압박이 강화할수록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피로감은 커진다. 향후 중국 내 투자를 확대하는 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미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 과정에서 중국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경우 중국 현지에 구축한 핵심 공급망이 일종의 볼모가 될 수 있다. 눈치작전을 벌이는 처지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를 만들고 쑤저우에서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에서 D램을 생산한다. SK하이닉스의 파운드리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도 우시에서 파운드리 설비를 운영 중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따르면, 중국 시장이 반도체 부문 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매출의 40%에 육박한다. 미국 요구만 들어주다가는 매출이 반 토막 날 수 있다.

인텔 중국 다롄 공장 전경  / 인텔
인텔 중국 다롄 공장 전경 / 인텔
연내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를 마무리하기로 한 SK하이닉스는 양국 분쟁으로 더욱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SK하이닉스는 인수합병의 첫 관문인 경쟁 당국 기업결합 승인 심사에서 중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이 미국과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뜻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중국이 어깃장을 놓을 가능성도 있다.

또 10나노급 미만 반도체 생산을 위한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수입하려던 계획은 미국의 중국 견제로 가로막혔다. 우시 공장의 첨단화가 예기치 못한 변수로 늦어지게 된 셈이다.

파운드리 세계 1위 대만 TSMC는 삼성과 SK 대비 편안한 입장에서 미국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 TSMC는 중국 내 반도체 양산 시설을 갖추지 않았고, 주요 고객사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 최근에는 일본 정부와 손을 잡고 중국 공급망 배제를 위한 현지 투자에 돌입했다.

반도체 업계는 한국 기업이 반도체 개발·설계에서 우위인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자원공급량과 안정적 수요가 강점인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인텔의 중국 투자 무산은 글로벌 반도체 기업 전체에 보내는 공급망 재편의 신호로 풀이할 수 있다"며 "그런데도 한국 반도체 기업의 ‘탈중국’은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미중 사이에서 경쟁력을 지킬 수 있는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