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미국 인텔 등 반도체 공룡이 올해 총 100조원 규모에 육박하는 설비 투자를 추진한다. 글로벌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한 ‘쩐의 전쟁’이 펼쳐진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에 걸맞은 첨단 장비를 확보하지 못하면 반도체 패권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 첨단 반도체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기’가 대표적인 첨단 장비다. 기업의 명운이 이 장비 확보량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네덜란드 ASML만 단독 생산하는 상황이고 연간 생산량에 한계가 있어 어려움이 가중된다.

EUV 공정은 선폭이 나노(㎚·1㎚=10억분의 1m) 수준인 초미세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기술이다. 기존 불화아르곤(ArF) 빛보다 파장이 14분의 1가량 짧아 반도체 공정 중 가장 앞서 있다.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좁을수록 저전력·고효율 칩을 만들 수 있는데, 회로를 좁히면 칩 크기가 줄어 한 웨이퍼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13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20년 10월 13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펴보는 모습 / 삼성전자
대당 2000억원이 넘는 EUV 장비는 1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미리 주문해야 원하는 시점에 수령이 가능하다. ASML은 최근 실적 발표에서 2021년에 EUV 장비 42대를 판매했다고 밝혔다. TSMC가 44%,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합산 35%, 중국 기업이 16%를 확보했다.

ASML 측은 "EUV장비 수요는 생산량을 40~50%쯤 웃돌고 있다"며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맞으려면 2~3년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와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인텔은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에 200억달러(24조원)를 투자해 2개의 첨단 반도체 공장(팹)을 건설한다. 이 공장은 2025년부터 인텔 신제품과 파운드리 제품을 생산한다.

TSMC는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를 통해 올해 400억~440억달러(48조~52조원)의 설비투자를 예고했다. TSMC의 투자 규모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인텔의 두배 이상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테일러 공장을 올해 상반기 착공해 2024년 하반기 가동을 계획 중이다. 설비 투자 금액은 총 170억달러(20조5000억원)다. 삼성전자의 미국 투자액 중 최대 규모다.

EUV 노광 기술 이미지 / ASML
EUV 노광 기술 이미지 / ASML
올해 투자 계획과 함께 EUV 장비 확보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인텔이다. 인텔은 2021년 8월 온라인 기술 전략 설명회에서 ASML의 차세대 제품인 하이(high) NA EUV 노광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팻 겔싱어 CEO는 "ASML과 협력을 강화해 차세대 EUV 제품인 하이 NA EUV를 업계 최초로 공급받을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인텔은 1월 말 유럽 반도체 생산 거점인 아일랜드에 처음 EUV 장비를 들여놨다. 인텔은 아일랜드에 신규 구축 중인 ‘팹34’에서 인텔 4공정(기존 7나노급 공정)과 EUV를 활용해 2024년부터 칩 생산을 시작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도 EUV장비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다. 유안타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EUV 장비 구매량은 2020년 8대에서 2021년 15대로 증가했고 2022년에는 18대로 늘어날 전망이다. TSMC는 2020년 20대, 2021년 22대, 올해 22대로 가장 많지만, 장비 도입 증가폭은 삼성전자가 앞선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3나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공정을 활용한 파운드리, 14나노 EUV D램 양산을 위해 EUV 노광기를 국내에 도입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2월 ASML과 5년간 4조7500억원에 달하는 장비도입 계약을 맺었다. 대당 가격과 총액을 추산하면 SK하이닉스는 5년간 20대 이상의 EUV 장비를 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와 삼성전자가 양분했던 EUV 장비 확보전에 인텔, SK하이닉스 등 또다른 강자들이 뛰어들어 경쟁이 치열해졌다"며 "장비 리드타임이 장기화 하면서 이들 기업의 투자 계획도 탄력적 집행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