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이 노랗게 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붉은 빛을 띠기도 했다. 귀걸이를 하고 다녔는데, 양쪽에 동일한 모양의 귀걸이를 달지 않았다. 가령 한쪽이 네모면 다른 쪽은 둥그런 모양이었다."

넥슨 창업자 고 김정주 NXC 이사가 2021년 3월 8일 열린 자신의 은사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던 도중 울먹이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넥슨 창업자 고 김정주 NXC 이사가 2021년 3월 8일 열린 자신의 은사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던 도중 울먹이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은 자신의 저서 ‘카이스트의 시간’에서 제자이자 넥슨 창업자인 고(故) 김정주 NXC 이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괴짜 천재, 게임을 산업의 한 축으로

김정주 이사는 독특한 외모만큼이나 행동도 남달랐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지만, 다른 학생이 대기업을 가던 일반적 경로와 달리 창업을 택했다. 특히 여러 산업 중 게임이라는 신생 분야에 뛰어들었다.

위정현 중앙대 다빈치가상대학 학장(한국게임학회장)은 당시의 게임 산업을 이렇게 표현한다. "초창기에는 게임 산업이 돈이 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한국에서는 게임이라는 산업 자체가 명함을 내밀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1994년, 그런 시대 상황에서 김정주 이사는 대학 동기인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등과 함께 자본금 6000만원으로 넥슨을 설립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얘기지만 넥슨의 설립 초기 주된 수입원은 게임이 아닌 홈페이지 구축이었다.

그런 넥슨이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세계 최초 그래픽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바람의 나라’다. 바람의 나라는 김 이사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넥슨은 바람의 나라 성공을 기반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김정주 이사는 과감한 인수합병(M&A)을 통해 넥슨의 기반을 다졌다. 그가 인수를 주도한 게임사가 내놓은 ‘메이플스토리’, ‘던전앤파이터’, ‘서든어택’ 등은 지금의 넥슨을 있게 한 대표 지적재산권(IP)으로 꼽힌다. 탄탄한 IP를 기반으로 넥슨은 성장 가도를 달렸다. 특히 넥슨은 던전앤파이터의 중국 흥행에 힘입어 2011년 한국 게임사 중 최초로 연간 매출 1조원을 넘어섰다. 또 같은 해 한국 기업 최초로 일본 증시 상장에도 성공한다.

위정현 학장은 김정주 이사에 대해 "한국 게임 산업이 성장하는 데 가장 초기 단계 창업자로서 크게 기여를 했다"며 "특히 유료 아이템 판매 모델 개발 등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고, 중국·일본·미국 등 해외 진출에도 적극 노력해 한국 게임 산업의 역사를 열었던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넥슨 창업자 고 김정주 NXC 이사(왼쪽)와 진경준 전 검사장. /조선일보DB
넥슨 창업자 고 김정주 NXC 이사(왼쪽)와 진경준 전 검사장. /조선일보DB
친구 잃고 이미지도 훼손…‘돈슨’ 오명까지

하지만 곡절도 많았다. 김정주 이사는 2012년 미국 게임사 일렉트로닉아츠(EA)를 인수하기 위해 서울대 공과대학 선배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손잡았다가 2015년 경영권 분쟁에 이르기도 했다. 당초 계획은 넥슨이 김택진 대표가 보유하고 있던 엔씨의 지분 일부를 인수해 자금을 마련한 뒤 함께 EA를 인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넥슨이 김택진 대표의 지분을 인수해 엔씨의 최대 주주로 올라섰지만, EA 인수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엔씨 경영에 참여하지 않겠다던 넥슨이 돌연 경영 참여로 입장을 선회하면서다. 김정주 이사와 김택진 대표의 사이가 멀어진 이유다. 결국 넥슨이 엔씨의 지분을 정리하면서 갈등은 일단락됐지만, 김 이사와 김 대표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러한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6년, 김정주 이사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진경준 전 검사장과 나란히 법정에 서야 했다. 서울대 동기였던 진 전 검사장에게 넥슨 비상장 주식을 사실상 무상으로 제공해 120여억원의 시세 차익을 얻게 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다. 2018년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30년 지기 친구의 우정은 공판을 더해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게임 업계 한 관계자는 진경준 전 검사장 사건이 김정주 이사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해당 사건으로 인해 김정주 이사의 국민적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며 "본인도 그만큼 자신이 추락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고 밝혔다.

승승장구하던 넥슨은 확률형 아이템 논란으로 인해 ‘돈슨’이라는 오명을 얻기에 이른다. 확률형 아이템은 게임 내 뽑기 시스템을 통해 무작위로 얻은 아이템을 말한다. 획득 확률이 낮은 좋은 아이템을 뽑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써야 하지만, 그동안 이뤄져온 자율 규제로 인해 이마저도 확률이 정확히 공개되지 않아 논란을 불러왔다. 특히 2021년 메이플스토리가 확률 조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넥슨은 트럭 시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넥슨 창업자 고 김정주 NXC 이사(왼쪽 네 번째)가 지난해 11월 경남권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업무 협약식에 참석해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넥슨재단
넥슨 창업자 고 김정주 NXC 이사(왼쪽 네 번째)가 지난해 11월 경남권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한 업무 협약식에 참석해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넥슨재단
"사회에 진 빚 갚기 위해 자녀 승계 없다"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여파 때문인지 김정주 이사는 2018년 5월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히며 재산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특히 이전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사회 공헌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김 이사는 어린이재활병원을 전국 주요 권역에 설립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으며 넥슨재단 설립을 통해 이를 실행에 옮겼다.

2019년에는 투자 회사이자 넥슨의 지주 회사인 NXC의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매각설이 나온 당시 김정주 이사는 입장문을 통해 "넥슨을 세계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드는 데 뒷받침이 되는 여러 방안을 놓고 숙고하고 있다"며 "어떤 경우라도 우리 사회로부터 받은 많은 혜택에 보답하는 길을 찾겠다"고 밝혔다. 넷마블, 카카오 등이 관심을 보였지만 10조원이 훌쩍 넘는 몸값으로 인해 결국 매각은 이뤄지지 못했다.

여러 굴곡에도 넥슨은 2020년 한국 게임사 중 최초로 연간 매출 3조원의 벽을 넘으며 게임 역사를 다시 썼다. 넷마블, 엔씨 등과 함께 명실공히 한국 대표 게임사 중 하나가 됐다. 김정주 이사 역시 여러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만, 그가 한국 게임 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김정주 이사가 지난 2월 27일 54세의 일기로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7월 NXC 대표이사직을 16년만에 내려놨는데, 당시 그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 듯 이같이 심경을 밝혔다.

"이제는 역량 있는 다음 주자에게 맡길 때가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보다 자유로운 위치에서 넥슨컴퍼니와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겠습니다."

임국정 기자 summer@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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