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 증권으로 인정?...탈중앙화 여부 놓고 국내 가상자산 정책 방향타

"리플(Ripple)과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소송 결과에 따라 우리 가상자산 정책도 지금과 다르게 가져가야 할 수 있다"

빅민우 금융위원회 금융혁신기획단장이 지난달 27일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 블록체인·디지털 자산을 위한 정책 프레임워크’ 토론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미국 소송 결과가 국내 증권형 토큰(STO,Security Token Offering)이나 가상자산 발행(ICO)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가상자산 육성 정책에 대한 기대가 높은 시점이다. 하지만, 제도 정비가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인력 및 자금의 탈 코리아가 가속화할 것이란 우려도 높다.

리플 1조4000억원 유통…증권으로 분류한 SEC

리플의 개발사인 리플랩스와 SEC의 소송이 시작된 건 지난 2020년 10월이다. SEC는 리플랩스의 자체 코인인 XRP를 ‘미등록 증권’으로 보고 리플랩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증권신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총 13억달러(한화 약 1조4000억원)에 달하는 XRP를 유통시켰다는 이유다. 증권형 토큰이란 증권의 속성을 가진 가상자산을 의미한다.

일찍이 스위스 금융시장감독기구인 핀마(FINMA)는 증권형 토큰을 유가증권으로 분류하고 금융시장법을 따르도록 했다. 이에 발맞춰 미국 SEC는 증권의 성격을 가진 가상자산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SEC는 ▲돈을 ▲기업에 투자해서 ▲수익을 기대하고 ▲제3자의 노력으로 수익이 발생하면 증권형 토큰으로 본다. 증권형 토큰에 해당하면 증권 신고를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공시의무, 불공정거래금지 등이 적용된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다.

리플은 은행들이 국제 송금에서 겪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진 코인이다. 자체 코인인 XRP 코인이나 IOU라는 차용증을 이용해 더욱 빠르고 저렴하게 자금을 보낼 수 있는 네트워크다. 4월 29일 기준 글로벌 가상자산 통계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리플은 시가총액 39조3096억원으로 글로벌 가상자산 7위를 기록하고 있다.

탈중앙 해석 모호…리플은 탈중앙? 구분 애매모호

소송의 쟁점은 ‘제3자’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다. 제3자 여부는 탈중앙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정석문 코빗 리서치 센터장은 지난달 28일 ‘건전한 ICO/IEO 시장 활성화를 위한 준비’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미국 SEC의 입장은 충분히 탈중앙화된 가상자산은 상품(Commodity)이고 그렇지 않으면 증권으로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탈중앙화의 기준과 해석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리플랩스와 SEC가 양보없는 줄다리기를 하는 대목도 이 부분이다. 운영 측면에서 리플은 프라이빗 블록체인으로 주식회사 형태의 영리기업인 중앙화 조직이다. 사전에 승인된 주체만 검증자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트코인 작동 원리와 차이가 있다.

탈중앙 블록체인의 대표적인 예는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 오픈 소스는 공개돼 누구나 수정·보완할 수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거래를 검증해 블록을 생성할 수 있다. 개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 운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다니엘 드레셔는 "전체 시스템을 동시에 종료할 수 있는 단일 구성 요구가 있다면 탈중앙이 아니다"라고 봤다.

경제전문 서적 작가이기도 한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화폐혁명’에서 "리플이 탈중앙 분산화의 이념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다만 합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면 탈중앙화 성격도 보인다. 다수의 금융사들이 리플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리플랩스는 이점을 강조한다. 리플랩스는 2018년 윌리엄 힌만(William Hinman) SEC 기업금융국 국장이 세미나에서 한 발언을 근거로 삼고 있다. 힌만 국장은 이더리움이 탈중앙화 구조를 바탕으로 거래되 증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리플은 XRP와 ETH가 같은 구조를 가진 가상자산이라며 법원에 발언의 근거가 된 자료를 요청했다. 올 초 지안카를로 미국 전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리플은 증권이 아니다. 리플이 증권이면 이더리움도 증권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리플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법적 공백에 따른 경쟁력 약화 우려…업계, 투자자 보호·지원책 마련 촉구

업계에서는 SEC 판결이 글로벌 기준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박민우 금융위 단장이 SEC 소송을 주시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다만 소송이 내년 초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국내 가상자산 관련 규제가 늦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자본시장연구원은 ‘미국의 STO에 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금융당국이 가상자산의 투자계약 해당 가능성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전통적 증권을 토큰화하고 증권토큰의 유통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제도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시장연구원 ‘미국의 STO에 관한 고찰’ 보고서, STO건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미국, 스위스, 영국, 독일 등으로 나타났다.
자본시장연구원 ‘미국의 STO에 관한 고찰’ 보고서, STO건수가 가장 많은 국가는 미국, 스위스, 영국, 독일 등으로 나타났다.
정석문 센터장에 따르면 지난 5년간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소재회사가 주도한 가상자산 프로젝트 비중은 2%에도 미치지 못한다. 가뜩이나 진행 상황이 더딘데, 글로벌 소송 눈치까지 보는 상황이라 한국의 존재감은 더욱 작아질 것이란 분석이다.

공태인 금융투자협회 조사국제부 연구원은 지난 20일 코스콤을 통해 "미국의 경우 가상자산의 증권성 여부를 확인한 후 규제에 적합하면 STO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며 "업계와 당국이 활발하게 소통하여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 새로운 증권형 토큰 산업이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고 밝혔다.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