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국내 스테이블 코인으로 한 때 촉망받았던 테라(Terra)가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의 블랙홀이 됐다. 50조원에 달하는 시가총액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마운트곡스 해킹 사건(2014년) 이후 8년 만에 글로벌 크립토 시장에 미친 초대형 충격파다. 테라의 성장과 붕괴, 그리고 앞으로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에 미칠 영향 등을 짚어봤다.

루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투자자 보호 방안 마련과 함께 기존 금융권에 적용하던 규제안을 확대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달러 패권을 위협하는 요인을 확인한 만큼, 가상자산을 자국의 관할 하에 편입시킬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치열하고 지독한 패권 유지 역사

미국의 달러패권 유지의 역사는 곧 근대 금융사라고 할 만큼 치열하고 지독하다. 1944년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래튼우즈 체제 출범이후 80년 동안 미국은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하며 글로벌 패권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첫 번째 위기는 1960년 대에 찾아왔다. 서독과 일본 경제의 급부상으로 미국의 위상이 축소됐다. 베트남 전쟁과 통화 팽창으로 달러 가치는 급락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국제수지적자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달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국제 통화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각 국가들이 금태환을 요구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됐다. 이른 바 ‘닉슨 쇼크’다. 당시 해외 보유 달러 액수는 800억달러인 반면 미국이 보유한 금 보유액은 100억달러에 불과했다.

달러와 금 환본위제가 무너졌지만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 우위로 달러 본위제를 지탱했다. 석유 결제를 달러로 하도록 하는 ‘페트로 달러’를 탄생시키는 한편, 군사력으로 각 국가의 정치에 개입했다. 이와 함께 ‘플라자 합의’로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유도했다. 미국 제조업은 가격 경쟁력을 갖춘 반면, 반면 일본은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잃어버린 10년’에 들어갔다.

미국 달러 패권의 위력은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알 수 있다. 미국은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 약 6400억달러 규모의 러시아 외환보유고 중 60%를 동결시켰다. 루블화는 가치가 폭락하며 휘청거렸다. 전쟁을 하지 않고도 경제를 위기로 몰아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대해 라구람 라잔 전 인도 중앙은행 총재는 미국의 달러 패권을 두고 ‘대량 파괴의 경제 무기’라고 일컬었다.

대안 화폐 등장·석유 결제 이탈…고개드는 달러 패권 ‘회의론’

러시아 금융 제재는 달러 패권과 동시에 비트코인의 위력도 새삼 확인하는 계기였다는 평가다. 러시아가 금융 제재를 피해 비트코인으로 자금을 조달하면서다. 업계에 따르면 당시 루블화로 거래된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거래량은 46억루블로 전쟁 발발 전보다 4배 넘게 불어났다.

우크라이나도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를 대체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면서 비트코인을 통한 기부가 증가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트위터를 통해 지갑 주소를 공개하고, 기부받은 비트코인을 활용해 군사 장비를 마련했다.

미국은 러시아 IP 접속 차단을 주문하며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를 압박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글로벌 거래소인 바이낸스, 크라켄, 코인베이스 등은 전면금지를 거부했다. 바이낸스는 "가상자산에 대한 접근을 일방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가상자산 존재 이유에 반하는 것"이라고 성명을 냈다. 브라이언 암스트롱 코인베이스 CEO도 트위터를 통해 거부 입장을 밝혔다.

가상자산이 대안 화폐로 등장,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업계에 따르면 스테이블 코인으로 가상자산을 결제하는 비율이 70~80%에 육박한다. 가상자산 데이터 사이트인 코인게코에 따르면 달러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의 시가총액은 200조원을 넘어선다.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 코인을 규제를 시사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20년간 달러화의 세계 통화 준비금 점유율이 낮아지는 추세에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 70%를 넘어서던 점유율은 지난 2020년 60%까지 떨어졌다. 이 가운데 석유 결제망에서 ‘탈 달러’ 움직임이 일고 전세계적으로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달러 패권 위협은 고조되는 분위기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지난달 디지털 자산을 주제로 한 연설에서 "달러는 어느 상황에서도 최고의 통화라는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상자산을 경계하는 미국의 본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루나 사태, 미국 스테이블 규제 강화 명분 마련

업계에서는 루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 정부가 스테이블 코인을 자국의 관할 하에 놓을 명분을 얻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규제를 강화하면서 자국 기업이 발행한 스테이블 코인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지난해 7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가 내놓은 ‘길고양이 스테이블 코인 길들이기’라는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세 가지 규제 방안이 제시돼 있다. ▲스테이블 코인에 은행처럼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거나 ▲지급 준비금을 액면가의 1대1로 보증시키는 방안, 혹은 ▲중앙은행이 직접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스테이블 코인에 과세를 해 시장에서 배제시키는 선택지도 있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증권거래위원회(SEC) 등 미국 정부와 관련 기관들은 그동안 스테이블 코인이 미국 달러화 유통 체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규제안 마련을 촉구했다. 지난 10일(현지시각) 옐런 장관은 테라를 직접 언급하며 "테라USD로 알려진 스테이블 코인이 급격하게 가치가 떨어졌다"며 "이는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정석문 코빗 리서치센터장은 지난 13일 ‘테라 스테이블코인 디페깅 보고서’라는 제목의 자료를 통해 "이번 사건은 (미국의) 규제 강화에 대한 강한 명분으로 작용해 규제 당국의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한다"며 "이미 제도권 친화적인 USDC와 같은 스테이블 코인이 상대적 수혜를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 금융업계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는 국내 블록체인 전문가는 "미국은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치밀하게 설계하고 신중하게 움직인다. 미국 정부와 금융가는 이번 루나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특히 국내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상당한 불이익을 받을 영향이 크다"고 우려했다.

이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정부와 금융계의 움직임을 음모론으로 치부하면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이번 루나 사태와 미국 정부의 대응을 보고 우리 블록체인 생태계 전반에 뿌리 내린 악습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