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시장에 대규모 투자계획을 내놓은 국내 배터리 기업이 ‘진퇴양난(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궁지(窮地)에 빠짐)’이다. 글로벌 완성차 기업과 합작법인(JV)을 설립해 공장을 짓는 중이거나 짓기로 한 공장의 투자 비용이 인플레이션(물가상승)과 고환율 여파로 예상보다 크게 불어날 수 있어서다.

상대적으로 북미 투자 규모가 크지 않은 삼성SDI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삼성SDI는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이 북미 시장에서 앞다퉈 생산능력을 키울 동안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우려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서 삼성SDI의 선택은 ‘신중한 판단’으로 재평가받는 분위기다.

건설 중인 얼티엄셀즈 미국 오하이오 전기차배터리 합작공장 / LG에너지솔루션
건설 중인 얼티엄셀즈 미국 오하이오 전기차배터리 합작공장 / LG에너지솔루션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미국 애리조나주 퀸크리크 1조7000억원을 들여 자체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한 계획의 전면 재검토에 돌입했다. 인플레이션과 환율 상승으로 계획한 투자비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투입될 것이 우려되면서 손익 재산정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 내부에서는 1조7000억원으로 잡은 투자비가 최대 2조원대 중반으로 불어날 수 있다는 추산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시기에 계획을 강행할 경우, 추가로 발생한 투자비용을 메우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자체 공장 건설 계획을 보류하고 최악의 경우 철회를 고민하는 이유를 GM·스텔란티스와 약속한 투자 계획에서 찾는다. LG에너지솔루션이 GM·스텔란티스와 발표한 합작 투자액만 10조5000억원에 달하는데, 이는 애리조나주 자체 공장 투자 규모인 1조7000억원의 6배가 넘기 때문이다. 단순 추산하면 LG에너지솔루션은 합작공장 설립 발표 시점보다 2조원에 육박하는 투자 비용을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 합작공장 투자액 증가분을 상쇄하려면, 애리조나주 자체 공장 건립의 철회가 가장 부담이 작은 선택일 수 있다.

SK온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 공장 / SK온
SK온이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 공장 / SK온
SK온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북미 배터리 투자 발표 시점과 대비해 최소 1조원 이상 투자 비용이 향후 추가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SK온은 포드와 총 10조2000억원을 투자해 129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미국 내 배터리 합작공장 3곳을 짓기로 했다.

삼성SDI는 5월 스텔란티스와 손잡고 최소 25억달러(당시 3조1500억원)을 들여 미국 인디애나주 코코모시에 전기차 배터리 셀·모듈 합작법인을 설립키로 했다. 이는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대비 3분의 1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아직까지 착공에 돌입하지 않아 부담도 덜하다.

최윤호 삼성SDI 대표(왼쪽)와 마크 스튜어트 스텔란티스 북미COO가 5월 25일 합작법인 투자 계약 체결 후 악수를 하고 있다. / 삼성SDI
최윤호 삼성SDI 대표(왼쪽)와 마크 스튜어트 스텔란티스 북미COO가 5월 25일 합작법인 투자 계약 체결 후 악수를 하고 있다. / 삼성SDI
배터리 3사에 따르면 양사는 각 합작법인과 함께 짓고 있는 배터리 공장 건설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2025년 7월로 다가온 신북미자유협정(USMCA) 발효가 배터리 3사의 단기간 내 북미 투자를 이끌었다.

배터리 기업은 USMCA가 발효한 후에는 미국·멕시코·캐나다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부품의 현지 생산 비중을 75%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무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국내 배터리 기업과 글로벌 완성차의 북미 합작공장 양산 시점이 대부분 2025년인 점도 이런 이유에 따른 것이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USMCA 발효 일정 내 북미에서 배터리를 양산하려면, 인플레이션을 이유로 완성차 기업과 약속한 합작공장 준공 일정을 미루거나 철회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경영환경 악화에 따라 투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라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