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반도체 제조에 필수인 희귀가스 수급 불안정이 이어진 탓에 스마트폰, 가전 등 완제품의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한다. 하반기 출시 예정인 애플과 삼성전자의 최신 스마트폰의 출고가 인상이 불가피하며, 가전 제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코로나19 거리두기 완화 이후 수요 위축 이슈가 있지만, 제품 가격마저 덩달아 인상될 경우 실적 부진 가능성이 높다. 한국 기업인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11일 러시아 관영 매체 타스 통신은 러시아가 5월 말부터 ‘비우호적’ 국가에 대한 희귀가스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희귀가스는 공기 중에 희박하게 들어있는 아르곤, 헬륨, 네온 등 6가지 기체 원소다. 이들 가스는 스마트폰에서부터 세탁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비자 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특히 반도체 노광공정에 사용되는 엑시머 레이저 가스의 원재료인 네온가스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수급이 어려워졌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네온가스 공급량의 30%를 차지한다.

3나노 파운드리를 세계 최초 양산하는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 삼성전자
3나노 파운드리를 세계 최초 양산하는 삼성전자 화성캠퍼스 / 삼성전자
국내 기업은 최근 네온가스 수입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5월 중국 네온 총수입액은 5436만달러(710억원)로 톤당 31만달러 수준에 달했다. 2021년 5월(톤당 수입액 5만2000달러)보다 가격이 6배나 치솟았다.

네온가스처럼 반도체 필수 소재이면서 우크라이나 생산 비중이 높은 크립톤과 크세논(제논)의 상황도 비슷하다. 5월 평균 수입가격(㎏당)은 크립톤이 1669달러, 크세논이 8992달러로 전쟁 발발 전인 2월 수입가격보다 각각 124%, 117% 상승했다.

최근 시장조사 그룹인 테크셋의 요나스 순드크비스트 선임 연구원은 앞서 러시아의 조치로 중국이 가장 큰 이득을 볼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2015년 이후 자국 반도체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희귀가스를 확보하는 장비에도 따로 투자를 해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네온가스의 대중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삼성·SK·LG 등 국내 기업은 새로운 리스크에 직면했다. 한국이 서방과 강력히 연대하는 정책을 편 것에 대해 중국이 ‘무역 보복’에 나설 가능성이 커져서다.

산업계 관계자는 "한국에는 미국, 유럽, 일본과 달리 생산을 늘릴 대형 가스 회사가 없고 대부분 희귀가스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에 이어 중국에서도 네온가스 수입길이 막힐 경우 국내기업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갤럭시Z 폴드3(왼쪽)와 갤럭시 플립3 / 삼성전자
삼성전자 갤럭시Z 폴드3(왼쪽)와 갤럭시 플립3 / 삼성전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반도체 필수 원재료 가격 급등 여파에 진퇴양난이다. 스마트폰과 가전 제품 판가에 원재료 인상분을 반영해야 하는데,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코로나19 펜트업(보복소비) 수요 소멸로 가격 책정이 고민이다.

삼성전자는 하반기 폴더블폰 갤럭시Z폴드4와 플립4의 출시가 예정돼 있다. 폴더블폰 시장 저변을 넓혀야 하는 상황에서 신제품 가격을 올릴 경우 소비자 저항이 커질 것으로 예상돼 울며겨자먹기로 동결 또는 인하를 관측하는 시선이 많다.

가전 사업은 반도체 가격 인상은 물론 소재, 물류비 등 상승에 이미 수익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2021년 각사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TV 평균가격은 전년 대비 32% 올랐고, LG전자의 냉장고와 세탁기 평균 판매가는 7.2%, 에어컨은 9.8% 올랐다. 양사의 가전 고급화 전략에도 1분기 삼성전자와 LG전자의 TV·가전 부문 수익은 뒷걸음질 쳤다.

이처럼 반도체 원재료 공급망 불안에 따른 가격 인상은 자동차, 스마트폰, PC 등 수요 산업의 제조 원가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지며 완제품 가격이 따라 오르는 ‘연쇄 인플레이션’을 동반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현재 희귀가스 문제 발생을 예견하고 대비를 해놓은 상황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중국뿐 아니라 미국산 등 우회 수입 방안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가스를 포함한 주요 소재에 대한 공급망 다변화와 글로벌 인프라 구축 등을 회사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대비해 왔다"며 "특정 소재를 한 곳에 의존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차질 없이 수급하도록 대응체계도 구축했다"고 설명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