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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훈의 블록체인과 핀테크]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입력 : 2017.08.09 06:00:00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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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그레샴의 법칙은 16세기 잉글랜드의 금융업자이자 상인인 그레샴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은화 주조용 부족현상의 원인을 설명하며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쁜 것이 좋은 것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

가상화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도 제법 많은 사람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것이기 때문에…'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들었다. 물론 똑똑해 보이는 표현일 수 있으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레샴의 법칙을 가상통화의 맥락에 적용하는 것이 적합한지 의문이 든다.

만약 가상통화가 명목화폐를 구축한(밀어낸)다면 가상통화는 악화(bad money)이고 명목화폐는 양화(good money) 인가? 만약 가상통화가 양화이고 명목화폐가 악화라면 가상통화는 생기자마자 사라져야 하는가? 이런 간단한 질문만 던지더라도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특정 법칙이나 규칙을 현상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 법칙의 배경과 의미, 그리고 의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레샴의 법칙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논의를 통해 왜 가상통화와 명목화폐의 관계에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될 수 없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그레샴의 법칙은 엄밀한 의미로 그레샴이 처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쓴 지동설을 주장한 그 과학자 맞다)가 1522년 썼던 Monetæ cudendæ ratio(주조국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내용은 처음 언급됐다.

당시 프로이센은 12세기 말 팔레스타인에서 결성된 튜튼 기사단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튜튼 기사단은 현재 발트 3국 및 폴란드 단치히, 포메른 일부 지역을 판도로 리투아니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압박을 견디지 못한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 대공은 폴란드 여왕과 결혼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탄생시켰고,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에 승리하며 기세를 잡았다. 1453년에 시작한 13년 전쟁에서 튜튼 기사단이 패배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이 됐다.

16세기 초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거의 10년간의 전쟁 중 전황이 어려워졌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거절당한다. 프로이센으로 돌아오는 길에 뉘른베르크에서 루터를 만나게 되고 그의 설득 때문에 신교로 개종, 튜튼 기사단을 해체하고 최초의 신교국가인 프로이센 공국을 탄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의 지속적인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은화의 은 함유량을 감소시키는데 은 함유량이 적은 새로 발행되는 은화가 기존 은화와 같은 가치로 거래된다면 발행자 입장에서는 시뇨리지(화폐발행으로 얻는 이익)를 발생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세금을 걷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문제는 은 함유량이 적은 새로운 은화가 많이 유통되면 은 함유량이 많았던 예전 은화를 녹여서 파는 것이 더 이익이기 때문에 새로운 은화만 사용하고 예전 은화는 사용하지 않아 화폐공급이 감소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세 가지 화폐 정책을 제안한다. 먼저 1418년 수준으로 은 함유량을 복귀시키고, 폴란드와의 고정환율제를 시행하며,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돈을 빌린 도시들은 많은 채무를 지게 됐고, 은 함유량의 감소는 채권 가치를 하락시켜 채무자들에게 유리해지기 때문에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26년에 다시 은 함유량을 낮추게 됐다.

1550년의 잉글랜드를 보면 1525년 프로이센과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 1509년에 즉위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이 아닐까. 1511년부터 16년까지 캉브레동맹의 일원으로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했다. 1521년부터 26년까지는 이탈리아전쟁에서 또다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전쟁을 벌였고, 1525년 파비아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오토만 제국을 끌어들여 코냑동맹 전쟁으로 확전됐다.

이번에는 편을 바꾸어 교황청, 베네치아와 손을 잡고 1530년까지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했다. 13년을 쉬고 난 1544년,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시작한 전쟁은 1547년 그의 임종까지 지속했다. 잉글랜드를 통치한 39년 중 무려 20년 동안 전쟁을 한 셈이다.

그럼 나머지 19년은 무엇을 했을까? 1527년 여왕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을 시도하였는데 교황이 허락하지 않아 실패했다. 사실 캐서린과의 이혼이 파비아전투 이후 코냑동맹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찰스 5세는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결국, 1531년 캐서린을 추방하고 153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앤 불린과 결혼했다. 1534년에는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국가로 전향했고 1536년에는 앤 불린을 처형하고 제인 시무어와 결혼했다. 1537년 에드워드 6세가 탄생하면서 제인 시무어는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1540년 앤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한다. 1542년 그는 캐서린 하워드를 처형하고 1543년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코냑동맹 전쟁이 끝난 1530년부터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하는 1544년까지 모든 시간을 6번 결혼하는데 쓴 것이다.

6번의 결혼과 종교개혁은 후계자를 얻어 안정을 꾀하려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밖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지속한 전쟁 + 종교개혁 + 6번의 결혼 = 돈' 이라는 식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아버지 헨리 7세나 딸 엘리자베스 1세와는 달리 헨리 8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엄청난 예산을 소비했다. 이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92.5%였던 기존 은화의 은 함량을 33%까지 낮추어 발행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이는 시뇨리지의 한 형태고 결국은 증세다.

1525년 프로이센, 1550년 잉글랜드의 공통점은 직접 증세가 아닌 지나친 시뇨리지로 정부지출(특히 전쟁자금)을 충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고 즉위 후 실링(영국 은화)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은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그레샴에게 조사를 명했다.

그레샴은 은화 이용자들이 은 함량이 높은 기존의 은화를 유통하지 않고 은 함량이 낮은 은화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은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것이 바로 그레샴의 법칙이다. 즉 그레샴의 법칙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두 화폐가 경제 내에서 같은 명목(거래)가치를 지니지만 ▲내재(실제)가치는 서로 다르다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가상화폐 이야기로 돌아오자. 가상화폐가 제대로 된 화폐로 정착하더라도 가상화폐와 명목화폐는 다르게 쓰일 확률이 높다. 전자거래를 선호하거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이용자들은 가상화폐를 선호할 것이고 기존의 화폐제도에 더 익숙하거나 (어떤 이유에서건) 현금거래를 선호하는 이용자들은 명목화폐를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첫 번째 조건은 만족하지 못한다.

또한 가상화폐와 명목화폐 모두 내재가치는 0이다. 명목화폐를 국가의 징세 능력과 연관 지으려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단 국가와 연관되는 법정화폐는 명목화폐의 한 종류일 뿐이고 법정화폐 또한 국가의 징세 능력과는 무관하다. 단지 법정화폐는 금전채무에 있어 채권자가 받아 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즉 두 화폐의 실제 가치가 다를 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상화폐와 법정화폐의 크라우딩 아웃(한 화폐가 다른 화폐를 밀어내는 현상) 또는 공존을 이야기할 때 그레샴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홍기훈 교수(PhD, CFA, FRM)는 홍익대 경영대 재무전공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비트코인 거래소 코인피아 자문위원이기도 합니다. 학계에 오기 전 대학자산운용펀드, 투자은행, 중앙은행 등에 근무하며 금융 실무경력을 쌓았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박사를 마치고 자본시장연구원과 시드니공과대(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 경영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주 연구분야는 자산운용, 위험관리, 대체투자 및 전자화폐로, 시드니공과대학 재직시절 비트코인 등 디지털화폐와 화폐경제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현재 SWIFT Institute 에서 연구지원을 받아 전자화폐가 진정한 화폐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연구 중입니다. 비트코인을 비롯한 디지털 화폐가 대체투자 자산이 될지, 자산운용 측면에서 어느 정도 효용을 가질지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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