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인터넷 강자로 군림하던 야후가 핵심 사업인 인터넷 부문을 미국 최대 이동통신사 버라이즌에 매각했다. 이로써 한때 시가총액 1250억달러를 자랑하던 야후는 역사길로 사라지게 됐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야후의 흥망성쇠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1994년 4월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전기공학 박사과정이었던 대만계 미국인 제리 양(Jerry Yang)과 데이빗 필로(David Filo)는 박사 논문 작성에 필요한 정보가 있는 사이트들을 찾아보기 쉽게 분류하는 웹사이트 목록을 만들었다. 두 사람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던 이 웹사이트 리스트는 뜻밖에도 스탠포드 대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치 전화번호부처럼 찾고자 하는 분야의 인덱스를 몇 단계 거치면 원하는 사이트로 이동할 수 있는 디렉토리 검색 서비스는 이들의 최대 강점이었다. 제리 양과 데이빗 필로는 1995년 4월 한 벤처 캐피탈로부터 400만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이 사이트를 본격적으로 사업화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원조 '야후!(Yahoo!)'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야후는 이후 검색 외에도 이메일, 뉴스, 인터넷 쇼핑 등 폭넓은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면서 포털 사이트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야후는 창업 첫 해인 1995년 140만달러(16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후 회사 설립 1년 만인 1996년 4월 야후는 순수 인터넷 회사로는 최초로 기업 공개(IPO)를 하기에 이른다. 1996년 야후는 1970만달러(224억원), 1997년에는 6740만달러(767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1997년 문을 연 야후 한국 사이트 홈 화면. / 인터넷 아카이브 제공
1997년 문을 연 야후 한국 사이트 홈 화면. / 인터넷 아카이브 제공
1997년에는 세계에서 6번째로 한국에 야후코리아 법인을 설립했다.당시 한국은 다음의 전신인 한메일넷이 무료 웹메일 서비스를 선보이면서 인터넷 시장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 일찍이 한국 포털 시장을 선점한 야후는 1999년 국내 최초로 2000만 페이지뷰를 돌파하며 한국 인터넷 태동기를 이끌었다. 같은 해 네이버와 다음이 포털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국내 인터넷 전쟁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렸다.

야후코리아는 2000년 초반까지 국내 포털 시장을 점령했으나, 국산 포털의 서비스 차별화 공세를 방어하지 못하면서 시나브로 시장 점유율을 국산 포털에 내줬다. 2003년에는 네이버에 국내 점유율 1위 자리를 빼앗겼고, 2005년에는 다음에도 추격을 당해 3위로 주저앉았다. 당시 글로벌 시장에서는 구글이라는 막강한 도전자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야후의 입지를 위협했다.

2000년대 후반 야후코리아의 시장 점유율은 5% 미만으로 떨어졌고, 결국 2012년 야후는 한국에서 철수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야후의 고전은 이어졌다. 야후는 같은 해 구글 부사장이었던 마리사 메이어를 CEO로 영입하면서 부활을 꾀했다. 마리사 메이어 CEO는 2013년 마이크로 블로깅 서비스 '텀블러'와 2014년 모바일 앱 분석 업체 '플러리'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모바일 전략을 강화했지만,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결국 야후는 인터넷 사업을 버라이즌에 48억달러(약 5조4400억원)매각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로써 야후는 중국 알리바바와 일본 야후재팬 지분을 유지·관리하는 투자 회사로 남게 됐다. 알리바바와 야후재팬 지분은 각각 312억달러(약 35조4000억원)와 83억달러(약 9조4100억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