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동의 특허토커] 발칙한 특허 'OPIS'

  • 유경동 윕스 전문위원
    입력 2017.07.06 07:42

    지난달 8일 특허청 주최로 서울 역삼동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개최된 '제7회 지식재산 정보서비스 SHOW & FAIR' 현장. 방청석에 앉아있던 A화학 B부장의 귀가 번쩍 띄었다. 이날 주제 강연 중 하나로 발표된 '이종분야 특허정보의 전략적 활용방법'을 듣고서다. 추진 중인 신규 프로젝트가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구세주를 만난 듯했다. 주제 발표가 끝나자마자 B부장은 해당 업체에 접촉, 새 프로젝트의 신규 용도는 물론, 잠재고객 파악까지 의뢰했다. 반드시 이종분야 특허정보를 활용해달라는 주문과 함께였다.

    '이종분야 특허검색(OPIS·Open Patent Intelligence Search)'이 일선 기업의 '문제 해결사'로 각광받고 있다. 특허 공보에는 방대한 양의 노하우와 최신 기술정보가 담겨 있다. 다행히 특허는 20년간 독점권을 주는 대신, '기술 공개'를 그 대가로 요구하는 제도다. 요즘은 각국의 특허를 온라인 DB에서 손쉽게 검색할 수 있어, 공개된 특허 공보의 내용, 즉 '특허정보'는 우리 기업들이 기술적 한계를 뛰어넘는데 보고(寶庫)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기술융합시대에는 '이종분야'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을 때가 많다. 최근 들어 OPIS가 급부상하는 배경이다.

    미국 식품업체 블라식. 이 업체는 햄버거용 오이절임(피클)을 주로 제조했다. 그런데 주고객인 햄버거 식당 업주들로부터 매번 항의를 받았다. 식당 손님들이 햄버거를 베어 물 때마다, 피클이 자꾸 삐져나와서다.

    블라식은 사내 연구 인력을 총동원, 문제 해결에 나섰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원 중 한 명이 출근길에 우연히 자신의 자동차 타이어를 보게 됐다. 지그재그로 나 있는 타이어의 무늬와 홈. 노면과의 마찰력을 극대화한 모양을 보고 연구원은 자신의 무릎을 쳤다. 이후 블라식은 햄버거용 피클 표면에 타이어 무늬가 남도록 제조 방식을 변경했다. 결국, 이 피클은 미국 식품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피클과 타이어. 아무 관련 없는 이종분야다. 하지만 문제의 실마리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위의 예에서 본 타이어 문양 피클은 '우연한 발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체계화·구체화하자는 게 OPIS의 기본 개념이다. 예컨대, 식품 분야에선 생각해내기 힘든 '마찰력'이나 '미끄럼 방지', '제동' 등의 키워드를 도출, 이를 특허DB 검색창에 넣어 보면, 결과값으로 '타이어' 관련 특허정보가 다수 등장한다.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나 기술을 피클 생산에 접목한다면, 우연이나 요행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추상화'다. 식품 분야에 고착된 전문용어에서 벗어나, '마찰력'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낼 수 있는 힘. OPIS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능력이다.

    타이어 무늬를 차용, 표면을 요철 처리한 오이 피클은 햄버거 사이에서 잘 삐져나오지 않는다.
    태주실업은 전원 멀티탭에서 플러그를 빼내는 불편함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뺄 때마다 탭 전체가 딸려 와, 손이나 발로 한쪽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플러그를 꽂을 때처럼, 뺄 때도 한 번에 할 순 없을까. 고심 끝에, 특허DB 검색창에 전원이나 플러그, 커넥터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푸시'와 '잠금', '열림' 등의 창의적인 키워드를 넣고 특허검색을 해봤다.

    그러자, 검색 결과물 중 하나로 나온 현대자동차의 '자동차 글로브박스 잠금장치 기술'이라는 한국특허(등록번호 0510297)가 눈에 띄었다. 글로브박스를 닫은 뒤, 열 때도 한 번만 꾹 누르면 되는 잠금장치의 개폐원리를 멀티탭에 적용했다. '클릭탭'이라는 혁신제품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클릭탭과 글로브박스는 제품 카테고리가 다르다. 현대차 특허의 권리범위에 속하지 않아, 특허권 침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종분야에 천착하는 OPIS의 또다른 장점이다.

    멀티탭에 자동차 글로브박스 개폐 원리를 접목, 획기적인 아이디어 상품이 탄생했다. / 태주실업 제공
    평온한 잠자리를 위해 소음 발생을 극소화해야 했던 온수매트 제조업체 A사는 온수펌프 모터에서 나오는 잡음을 잡지 못해 애를 먹었다. A사는 '펌프를 쓰되,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는 분야가 뭘까?'를 고민하던 중 '인공심장 펌프'를 착안, 이 분야 관련 특허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행히 특허 기간이 만료된 '샤프트 없는 펌프' 기술을 '발라'냈고, 이 기술을 기존 제품에 차용하는데 성공했다.

    이 밖에 스마트폰 열풍 이후 존폐 위기에 놓였던 폴더폰용 안테나와 힌지(경첩) 제조업체가 각각 '진공청소기 흡입기 길이조절 장치'와 '외과용 인공관절' 제조업체로 깜짝 변신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모두 OPIS 덕이다.

    OPIS는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유연한 시각, 즉 '추상화' 과정이 필수다. 판에 박힌 고정관념을 떨치고, 창조적·도발적 '키워드'를 끄집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인문학적 소양과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문과 계열 출신들의 진출 가능성이 큰, 대표적인 4차산업 분야로 손꼽히는 이유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경동 위원은 전자신문 기자와 지식재산 전문 매체 IP노믹스의 편집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국내 최대 특허정보서비스 업체인 ㈜윕스에서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입니다. IP정보검색사와 IP정보분석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특허청 특허행정 모니터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특허토커'와 'ICT코리아 30년, 감동의 순간', 'ICT시사상식 2015' 등이 있습니다. '특허시장의 마법사들'(가제) 출간도 준비중입니다. 미디어와 집필·강연 활동 등을 통한 대한민국 IP대중화 공헌을 인정받아, 올해 3월에는 세계적인 특허전문 저널인 영국 IAM이 선정한 '세계 IP전략가 300인'(IAM Strategy 300:The World's Leading IP Strategists 2017)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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