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시바가 반도체 사업부문 자회사 '도시바메모리' 인수 우선협상대상자였던 한·미·일 연합 대신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을 중심으로 하는 신(新) 미·일 연합과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한·미·일 연합의 한 축이었던 SK하이닉스는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우선협상대상자 지정은 법적 구속력이 없어 도시바의 행보를 문제 삼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다만, 도시바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이 중화권에 넘어가는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는 점에서 SK하이닉스가 애초 기대했던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는 분석도 나온다.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생산 핵심 거점인 미에현 소재 요카이치 공장 전경. / 도시바 제공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생산 핵심 거점인 미에현 소재 요카이치 공장 전경. / 도시바 제공
◆ WD 몽니에 두 손 든 도시바, 新 미·일 연합과 협상 시작

27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도시바는 WD와 미국 투자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일본 산업혁신기구(INCJ), 일본정책투자은행 등이 결성한 새로운 미·일 연합과 31일 마무리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기존 한·미·일 연합에서 한국 SK하이닉스와 미국 베인캐피털의 자리를 WD와 KKR이 꿰찬 셈이다.

신 미·일 연합은 도시바메모리 인수가로 2조엔(20조5200억원)을 제시했다. 기존 한·미·일 연합과 논의한 금액과 비슷한 수준이다. WD는 전환사채 형태로 1500억엔(1조5400억원)을 투자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주식으로 전환하면 WD는 향후 의결권의 15~16%를 보유하게 된다.

도시바는 2017년 1월 미국 원전 사업에서 7000억엔(7조1900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발표와 함께 시가 시게노리 회장이 사임했다. 도시바는 2월 자구책으로 반도체 사업부문을 분사해 매각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SK하이닉스, WD, 대만 홍하이정밀공업(폭스콘) 등이 예비입찰에 참여했다. 도시바는 6월 SK하이닉스를 포함한 한·미·일 연합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WD는 자회사인 샌디스크가 도시바와 오랜 협력 관계를 이어온 점을 들어 국제중재재판소에 매각 금지 중재를 신청하는 등 도시바 발목 잡기에 나섰다. 도시바도 WD에 맞소송 대응하는 등 강경 태세를 보였다. 하지만 도시바는 매각을 8월 중으로 매듭 짓지 못하면 2018년 3월까지 자본잠식을 해소하지 못할 것이라는 압박에 결국 WD에 무릎을 꿇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스티브 밀리건 WD 최고경영자(CEO)는 8월 중 일본을 방문해 쓰나카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과 만나 최종 매각 협상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WD는 이 회동에서 국제중재재판소에 제기한 도시바메모리 매각 금지 중재 신청을 취하할 가능성이 높다.

◆ SK하이닉스, 낸드플래시 시장 수직상승 야망 꺾이나

이로써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참여해 상대적으로 뒤쳐진 낸드플래시 경쟁력을 강화하려던 SK하이닉스의 큰 그림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전 세계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도시바와 WD는 2017년 2분기 각각 17.5%의 점유율로 동률을 기록했다. 두 회사의 점유율을 합치면 35%로, 이 시장 1위인 삼성전자(35.6%)를 바짝 추격하게 된다.

반면, 마이크론과 4~5위를 엎치락뒤치락하던 SK하이닉스는 2분기 점유율 9.9%로 10%대를 지켜내지 못하면서 마이크론(12.9%)과 격차가 소폭 벌어졌다. SK하이닉스는 D램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에 이어 2위 기업으로 입지를 공고히 하지만,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반등의 기회를 찾지 못하는 중이다.

WD가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하면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은 삼성전자와 WD·도시바 연합이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가 추격하는 지금과 같은 양상이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그나마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도시바메모리가 중화권 업체에 넘어가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막아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해석할 만한 부분이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도시바의 이번 결정으로 중화권 업체가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할 잠재적인 리스크는 막았다"며 "도시바와 WD는 이전부터 낸드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 협력해왔으나, 인수전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감정적 갈등이 깊어져 원활한 협력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